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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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시간(빌 3:17~4:1 눅 13:31~35)

  • 관리자
  • 2019-03-17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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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시간
빌 3:17~4:1 눅 13:31~35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지난주에는 ‘침묵’을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번 주에는 ‘고난’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읽은 서신서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고난의 이중적인 의미

 

 

‘고난’이 우리의 삶을 연단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피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이 심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으며,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욕망이나 잘못 때문인 경우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쉽게 ‘고난’을 사유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손쉽게 고난 속에서 힘겨워하는 이웃들에게 ‘고난은 삶을 위한 디딤돌이’라면서 받아들이라는 소리를 하거나, ‘고난의 때에 힘들어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타인의 고난’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합니다. 심지어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도 많이 하지요? 고난의 상황이 여전히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도 고난과 맞서 싸워 이기는 것보다는 회피하는 쪽으로 안내합니다.

 

어떤 고난은 묵묵히 받아들이며 이겨나가야 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고난은 싸워가며 극복해야 할 것도 있고, 어떤 고난은 단호하게 거부해야만 하는 것도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 고난인지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며 디딤돌로 삼아야 하는 고난은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겪는 고난’이며, 자신의 삶을 세워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고난입니다. 반면, 우리가 싸워야 하고 거부해야 하는 대표적인 고난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고난과 능동적인 고난이라고 표현해볼 수도 있습니다.

우선 자기의 욕심이나 사회 구조적인 악 때문에 경험하는 수동적인 고난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옳은 일과 자신을 세워가기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능동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능동적인 고난을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쥬이상스(jouissance)’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잉여쾌락’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잉여쾌락’이란, 스스로 선택한 능동적인 고난이나 옳은 길을 선택함으로 고난을 겪게 될 때 느끼는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 자부심이 주는 기쁨은 고난에 비교하면 ‘잉여’ 즉, 더 높은 가치를 매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고난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더 옳은 일을 위해 고난을 택하고, 그것을 감내하는 분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런 ‘쥬이상스’의 기쁨을 아는 이들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순절 둘째 주일 교회력의 말씀 또한, 바로 ‘고난’이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서신서의 말씀을 살펴보고 복음서의 말씀을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빌립보서 3:17~4:1

 

 

서신서의 본문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현실(3:18)’이지만 ‘주 안에 서라(4:1)’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지만, 그들이 믿는 신은 ‘배’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배’는 ‘코일리아(κοιλια)’라는 단어의 해석인데 ‘인간의 육체적인 욕망’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육체적인 욕망’을 위해서 복음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3:19)”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그들에게 고난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수동적인 고난으로 자신들이 왜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려면 “나를 본받으라”고 17절에서 권면합니다. 그래야만 ‘주안에 서는 삶(4:1)’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받으라’는 말은 ‘코페이테(σκοπειτε)’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자세히 눈여겨 지켜보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삶을 자세히 눈여겨보고 본받아 지키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 자들이 받는 허망한 고난이 아니라, ‘쥬이상스’로 들어가기 위해서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눈여겨보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요, 증거입니다. 사순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눈여겨보시고, 순종하시어 쥬이상스의 삶을 통해 ‘주 안에 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누가복음 13:31~35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아주 직설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소외당하던 이들에게는 어지셨던 예수님이셨지만, ‘배’를 신으로 믿는 사람(빌 3:19)들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팔아먹는 것도 모자라 민중들의 삶을 희생제물로 삼아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 하는 독설도 모자라 “지옥에 갈 것”이라는 저주까지 퍼부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바리새인(눅 13:31)’들이 나와서 예수님께 “지금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를 떠나십시오.” 조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더 강하게 헤롯을 향하여 “저 여우!”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일성을 고합니다.

 

“선지자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너희에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너희 집이 황폐하여 지리라(34).”

 

본문에서 ‘어떤 바리새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마치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이 닥쳐올지 모르니 어서 예루살렘에서 피하십시오!” 조언하는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34~53절의 부정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우호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여우’라는 동물은 ‘간교하고 교활한 사람을 지칭하는’의 상징으로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헤롯에게 ‘여우’라고 하셨을까요? 헤롯은 자신의 관할 지역인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부추겨, 예수님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내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모를 리 없었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고하시는 “너희 집이 황폐하여지고,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받는 고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말씀에는 또 다른 고난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34절 말씀에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고난이 바로 그것입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는 사술(레 20:27)이나 우상숭배자(신 17:5,7) 등 ‘가증스러운 범죄자’들을 처벌할 때 ‘돌로 쳐죽이는’ 형벌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벌은 이집트에서 430년간의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야훼종교를 혼합 종교화되게 하려는 어떤 시도든지 분명하고 애초에 단호하고도 강력하게 단절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담아 ‘돌로 쳐 죽이라!’는 법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야훼의 종교를 떠난 이들이 하나님의 법이라면서 선지자들과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고난을 겪게 되실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고난이 닥쳐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고, 그 덕분에 우리에게 십자가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시어 ‘주 안에서’ 바로 서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고난의 시간

 

 

우리의 욕심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지만, 옳은 일을 위해서 받는 고난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이들과 임마누엘 하시며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시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선한 일을 위해 고난을 겪고 있다면,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 어떤 ‘고난의 시간’이라도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귀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두질’과 ‘담금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무두질은 뻣뻣하던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고, 담금질은 무르던 쇠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죽에 붙어있던 기름 덩어리와 털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지속해서 방망이질하듯 가죽을 두드려 주면 가죽이 부드러워집니다. 이것이 무두질입니다. 뜨거운 용광로에서 단단하던 쇠가 녹아 불순물이 제거되고, 달궈진 쇠를 모루에 올려놓고 쇠망치로 두드리면 쇠가 단단해집니다. 바로 이런 ‘두드림’의 과정이 바로 ‘고난의 시간’이 아닐까요? 이 두드림의 과정 없이는 부드러운 가죽도, 단단한 쇠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무두질과 담금질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향기를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사순 절기에 ‘고난’을 묵상하시고, 기꺼이 선한 일을 위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의 시간으로 들어가십시오. 욕망 앞에서 안절부절못하여 부끄러운 고난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삶과 결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도 깊어지고, 향기 있는 삶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위해서 기꺼이 감내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부심을 품고 견디어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어 반드시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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