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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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사순절 첫째주일)

  • 관리자
  • 2019-03-17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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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사순절 첫째주일)
열왕기상 18:37-40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이지요. 이 기간은 성회수요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절까지 40일의 기간입니다. 성회수요일은 다른말로 ‘재의수요일’이라고도 합니다. 재의 수요일은 과거에 회개할 때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의식에 따라 생긴 말입니다.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바로 이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다는 것은 분명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일, 그것이 회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회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보통은 울부짖으며 소리 높여 기도하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회개한다’는 언어에 덧씌워진 잘못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사실 ‘회개(metaninia)’는 마음 깊은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 깊은 곳을 바라보는 것은 또한 고요한 침묵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심층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고자 한다면, 감히 떠들거나 울부짖을 수 있을까요? 고요하게 침묵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침묵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침묵의 시간’은 세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야 가질 수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시와 멀리 떨어진 기도원에 가거나 산 속으로 잠시 들어가는 선택을 하기도 하시죠. 그러나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또한 온전한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몸이 기도원이나 깊은 산 속에 있다 한들, 우리의 생각이 세상의 분주함을 떨쳐내기 어렵다면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일은 더욱 어렵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침묵하는 일’은 어딘가로 떠나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늘 노력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시대에 우리는 ‘침묵’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침묵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은 어떤 가요? 누군가와 대화할 때에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말만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말은 전혀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못하고 오해할 뿐입니다. 이런 모습을 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침묵의 시간 입니다. 이를 통해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보화가 보이게 됩니다. 온화하고 평온한 마음과 에너지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로 타인의 말도 차분히 경청할 수 있게 됩니다.

 

사순절에는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나를 만나는 과정을 꼭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꼭 만나시길 바랍니다.

 

기도란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일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 문법(grammar)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며 매일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말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 또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아니라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말로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선 ‘문법’이 필요 합니다. 문법, ‘grammar(그래머)’는 단어를 배치하는 기술입니다. 무작정 단어를 나열한다고 곧 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에 따라서 배열되어야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잠시, 시 한 편을 감상해 보겠습니다.

또 태어나
선 채로 묵상하시네
사스락
사스락
밤새 뒤란 댓잎께서 위벽 앓으시네
유일한 힘



가끔 딱딱하게 자진自盡하시며
연한 댓잎
하늘솥뚜겅 밀어 올리시네

(김응교 시인의 ‘대’ 전문)

 

저는 개인적으로 셋째 연 ‘유일한 힘/텅/빈/뼈’ 부분에서 시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텅 빈 뼈’는 곧게 자라는 대나무의 줄기를, 그 위에 ‘유일한 힘’은 대나무 줄기에 풍성한 댓잎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한 글자 씩 간격을 주어서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잠시 이 부분에서 숨을 고르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시인의 아름다운 시는 단순히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격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음표와 음표 사이의 간격과 쉼표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간격’의 다른 말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쉼이요, 침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아름답게 가꿔가고, 그 아름다운 생각으로 말다운 말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침묵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순절에는 ‘침묵의 시간’으로 여러분의 생각과 말을 가꿔가시길 바랍니다.

 

■ 예언자(대언자)

 

침묵의 중요성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히브리어로 ‘나비(nabi)’라고 합니다. 예언자들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점쟁이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신의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가감 없이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감 없이 신의 소리를 전해야 했기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식을 전할 때에야 환영을 받았지만, 듣기 거북한 소리를 전하면 곧바로 비난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요즘 말로 하면 ‘스마트(smart)’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이 단어는 ‘빠르고 똑똑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만, 본래 의미는 ‘괴로움을 주는, 고통을 수반하는’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은 진리를 깨닫는데 둔감하거나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데 먼저 깨닫고 신의 음성을 들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게 전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등의 예언자뿐 아니라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셨지만, 그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혼자만의 시간’ 즉, ‘침묵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 침묵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수반하는 시간을 통해서만 스마트한 사람이 되니 스마트란 단어의 어원이 ‘괴로움, 고통’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 엘리야

 

본문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야에게도 ‘침묵의 시간’이 존재합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아합왕은 나라를 부유하게 건설한 유능한 왕이었으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와 우상숭배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이방 여인 이세벨이 가져온 우상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며 야훼 종교를 훼손하였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평가하기를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했다(왕상 16:30)’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북이스라엘은 배금주의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사회 체제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노하셔서 엘리야를 통해 그 땅에 가뭄의 재앙을 내립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고자 요단 앞 그릿시냇가 근처의 동굴에서 40일 동안 물이 마르기까지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연명하다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숨어 지냅니다. 가뭄이 시작되고 삼 년이 지난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 왕에게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450:1의 싸움을 벌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합니다.

 

엘리야에게 있어 그릿시냇가와 사르밧과부의 집에서 지낸 삼 년의 시간은 곧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자신을 죽이려던 아합 왕 앞에 두려움 없이 다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요즘 스마트한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 어린 꼬마들도 다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입니다. 요즘 ‘스마트폰’을 통해서 우리는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동서고금의 지식과 석학들의 지혜를 한순간에 만날 수 있습니다. sns를 통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고, 심지어는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편리해진 면도 있지만, 악영향도 많습니다. Sns로 실시간 공유되는 소식들을 알지 못하면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게다가 sns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에는 가짜뉴스나 광고까지 가득하여서 혼란스럽습니다.

 

스마트폰은 편리하지만 괴로움을 주기도 하는 미운 오리 새끼가 분명합니다. ‘스마트’라는 어원이 ‘괴롭게 하다’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짓긴 했습니다.

 

여러분, 사순절엔 스마트폰을 좀 멀리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그것도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지난주에 나눠 드린 사순절 묵상자료를 참고로 하여 마가복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여러분만의 골방에서 침묵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사순절에는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나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 시간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과 말을 가꿔가시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꼭,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골방에서 침묵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함석헌 선생의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중략)

그대 맘의 네 문 밀밀히 닫고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으면
극진하신 님의 꿀 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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