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3.1절 100주년 기념주일)
마가복음 2:18-22
하버드 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강의했던 신학자 Harvey Cox(1929~)는 2010년 『신앙의 미래』라는 책에서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종교인’ 혹은 ‘비종교인’ 그리고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처음 등장한 1~3세기를 ‘신앙(faith)이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기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 시기는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제정한 4~20세기까지로, 무려 1600년 동안의 시기로 ‘믿음(belief)의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간에는 ‘정통과 교리’를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근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21세기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세 번째 시대인 ‘영성(spirit)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교는 이미 ‘영성의 시대’로 진입했는데, 신앙인들은 여전히 두 번째 시대인 ‘믿음의 시대’에 머무르면서 교리를 숭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갈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종교가 되었고,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믿음의 시대에 지배 권력이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비 콕스는 만일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영성의 시대’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초대교회가 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가는 신앙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는 영성의 시대로 나아가려면,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통해서 표층신앙에서 심층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 표층신앙과 심층신앙
이 용어는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인 오강남 교수가 『예수는 없다』는 책에서 사용한 용어입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제목인 이 책에서 오강남 교수는 4~21세기 ‘믿음의 시대’를 통해서 문자화되고 교리화된 근본주의자들이 믿는 예수는 없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문자에 표피적인 뜻에만 머무르는 표층 종교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를 깨닫는 심층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강남 교수는 표층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예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제목이지만, 초대교회가 걸어왔던 신앙의 시대, 새롭게 도래한 영성의 시대에 참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 목회자는 하나님인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걱정되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는 목사들이 여전히 ‘믿음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인 신앙 1세대는 그 당시의 뜨거움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것과 개혁해야 할 것을 혼동한 결과 표층신앙을 극복하고 심층신앙으로 나아가고자 하던 이들을 배척하고 영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를 포용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삶이 없는 신앙생활, 교회 안의 교인(Sunday Christian)을 양산했습니다. 목회자들에 대한 순종을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믿는 세대들은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아멘!”하는 맹목적 신앙을 순수한 신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자, 혹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사 노릇을 자처했습니다. 그 결과는 아주 비참합니다. 목사가 헛소리하고, 정치설교를 해도 무조건 토 달지 않고 “아멘!”입니다. 결국, 영성의 시대라는 새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권위를 갖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뜻대로 해석하고 왜곡하고 전하고 싶은 말만 전한다면 삯꾼에 불과합니다. 때론, 자신의 뜻과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전해야 하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아픔이자 동시에 권위입니다. 제가 한남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할 때에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100% 그랬냐고 물으신다면, 자신 있게 “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양심’에 따라 말씀을 왜곡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제가 깨달은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한계 때문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 3.1절 100주년 기념일에 부쳐
오늘은 ‘3.1절 100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삼일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는데, 과연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기독교가 그 중심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주 무거웠습니다.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형편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자괴감이 듭니다. 비록 교회는 작아도 교단은 작아도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는데, 이젠 그것조차도 다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1919년 3.1운동’은 아주 위대하고 특별한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입니다. 중국의 5.4혁명도 삼일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간디의 비폭력운동 역시도 그렇습니다. 식민지지배가 당연히 여겨지던 제국의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고, 마침내 독립을 쟁취한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 일의 중심에는 한 사람의 위대한 인물이 있는데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몽양 여운형’입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김규식을 1919년 1월 8일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된 대한민국이 독립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1919년 일본과 세계 각국의 대사관에서 ‘2.8 독립선언’으로 발전했고,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의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삼일 만세운동이 계획되었고 실행되었던 것입니다. 친일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에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이후 해방되기까지 일본과 친일파에 의해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엄청난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오직 그들은 조국이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방 이후, 권력욕에 빠진 이들 때문에 좌우 이념의 대립이 격화하고, 이것을 이용해서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세워지게 되었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희생양이 되어 한국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한국전쟁 이후, 좌우의 이념대립은 양 극단을 달렸고, 이후 한국사회는 반공이데올로기가 곧 국시가 되었습니다.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된 서북청년단은 1948년 제주 4.3항쟁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고, 한국 전쟁 이후 부흥기를 구가하던 한국교회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신앙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권력을 잡은 이들은 이런 교회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시녀로 삼았고, 국가 조찬기도회 같은 것으로 권력과 교회가 야합하는 행태를 보여온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주축이 되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전개해서 그나마 건강한 교회의 맥을 이어왔지만, 요즘은 기장도 제 역할을 못하고, 한국교회는 극우보수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시대는 새 포도주가 되었는데 한국 교회는 여전히 낡은 가죽 부대에 머물러있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하비 콕스의 예견대로,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되었는데 여전히 교회는 ‘믿음의 시대’를 고집하면서 새 포도주에 해당하는 젊은 세대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혹,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교회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새 포도주’라기 보다는 ‘믿음의 시대의 신앙을 박제한 박제된 신앙’을 추구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교회의 역사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표층신앙에 머물러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교회는 삼일절 100주년 기념 주일에, 역사를 위해서 무엇을 하자고 하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금식논쟁’과 관련한 문제가 생겼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자,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던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세례를 통한 회개운동을 전개하던 요한의 제자들조차도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금식’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금식의 참된 의미는 ‘자기 비움’과 ‘나눔’이라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금식의 목적은 음식을 먹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연결되어 ‘자신의 뜻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의 전환점에서 세속에 물든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이 금식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금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자신의 변화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 떼쓰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예수님을 반대하던 이들은 물론이고, 예수님께 우호적이던 사람들조차도 ‘금식’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음식을 먹는지 안 먹는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낡은 가죽 부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갓 담근 포도주가 새 포도주가 아닙니다. 오래 숙성된 포도주가 비싼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랜 숙성의 과정을 거친 포도주가 가진 고유한 맛 때문입니다. 오랜 숙성의 과정에서 변질하거나 상하지 않고 잘 발효되어 포도주의 깊은 맛을 간직했으니 귀하고, 귀한 만큼 값도 비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 그것은 예수님께서 새로 창설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대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미 주신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 미운 마음을 품고 있으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포도주’입니다. 본질의 심층으로 들어간 예수님의 말씀, 그것은 기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 속으로 깊이 들어간 말씀,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영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성의 시대에서 표층 종교는 종말을 고하고 심층 종교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우리가 살고있는 역사에 무책임하며, 사후세계에만 집착하는 종교도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낡은 가죽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는 일입니다. 이 일은 단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인내로써 낡은 가죽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시어, 새 포도주를 담아 넉넉하게 발효시킬 수 있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