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하시는 순서(주현절 5주 20190203)
예레미야 1:4~10 / 시편 71:1~6/고전13:1~13/ 눅4:21~30
내일은 立春(입춘)입니다.
이미 봄을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아직 봄은 작고 여려서 무딘 사람들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봄은 왔고, 봄은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자라갈 것입니다. ‘봄’이라는 명사는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볼 것이 많은 계절이라 ‘봄’이라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인생을 사계절로 대입하면 ‘봄’은 어린이와 청소년기, 여름은 청년기, 가을은 중년기, 겨울은 노년의 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봄’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봄에 피어난 여린 새싹과 꽃들이 성장하지 않고 머물러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봄에 피어난 것들은 꽃을 피워야 하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겨울은 겨울대로 의미 있습니다. 겨울은 봄을 품고 있으며, 겨울을 머금은 봄의 향기가 더 깊고 색은 화사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 없는 봄은 찬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전도서의 말씀대로 ‘때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지, 삶의 어느 한 계절에 머물러 있으면 아름답지 못합니다.
■ 교회력 본문의 연관성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출발하지만, 머물러있지 않고 자라야 합니다. 입춘을 앞두고 우리에게 주신 교회력은 예레미야 1:4~10. 시편 71:1~6, 고린도전서 13:1~13, 누가복음 4:21~30절의 말씀입니다. 교회력 본문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어린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소명을 맡기고자 할 때에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하고, 시편의 말씀에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다(5,6)”라고 .
고린도전서에서는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11)”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면서 예수를 어릴 적부터 보아왔는데 선지자는 무슨 개뿔 선지자냐? 미친 것 같으니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죽이자고 하는 내용입니다.
■ 어린아이의 의미
성경에서 ‘어린아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로 떼 묻지 않은 ‘순수성’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의미로는 ‘성숙하지 못한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린아이’의 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태에서부터 태어나 어린아이가 되고, 그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숙한 어른 안에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어린아이 과정을 건너 띤 어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고 할지라도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통과제의, 꼭 보내야만 하는 시기라는 점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에 ‘모든 것을 때가 있다’고 했는데, 이 ‘어린아이’의 때도 그 모든 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하시는 순서
성경의 역사를 에덴동산에서부터 큰 틀에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묻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끝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또 죄를 범하면, 또 심판하고 다시 구원하십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런 일이 지속해서 반복됩니다. 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그릇에 담긴 물이 더러워졌으면 그 물을 완전히 쏟아버리고 그릇을 깨끗이 한 후에 새 물을 담아야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면 ‘뽑고, 허물고, 멸망시키고, 파괴한’ 후에 다시 ‘세우고 심는’ 회복운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멸당 당하여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새롭게 성전과 성벽을 세워가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인간은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난의 때에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늘 좋은 것만 달라 하고, 언제나 자신이 생각할 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신앙의 깨달음은 어린아이인데 행동은 제어할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전반적인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요즘 어떤 보수적인 기독교단체에서는 ‘기독입국’이라는 경망스러운 말을 하고,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 ‘칼 들고 설치는 어린아이’와 같아 보입니다. 각종 이단 사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위 정통이라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어린아이 상태로 놓아두려고 하고, 교인들도 어린아이로 머물고 싶어합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가 많아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하고 손가락질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는 여러분과 한남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과 제일 가까웠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그는 바로 ‘모세’였습니다. 그다음으로 친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두 번째에 놓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친애하던 예언자였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모세와 닮았다고 여겼기에 모세의 소명 설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연결했습니다. 모세의 간곡한 거절에도 하나님이 그를 택하여 위대한 지도자로 쓰셨듯이, 예레미야도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1:5)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사야보다 약 100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였습니다. 요시아 왕 제13년이었던 기원전 626년에 소명 받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인 기원전 587년까지 예언을 했습니다. 이 시기는 야훼종교가 심각하게 이교화되어 혼합종교가 되어버렸고,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도 실패로 돌아간 시기였습니다. 강대국 바빌론이 차일피일 유다를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 그때 예레미야는 사랑하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언을 듣는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예레미야가 매국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예언에 사람들은 비아냥거렸고, 심지어는 가족들조차도 그에게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성품이 곱고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족들과 회개도 없이 조롱하는 이들이 퍼붓는 조롱을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예레미야 20장 14~18절에서는 마치 욥처럼 자기의 생을 저주할 정도로 “어찌하여 저의 고통이 멈추지 않습니까?”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니 전하기는 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매일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하여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르게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그 멸망을 목격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성벽이 무너지고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가난이 지배하던 그 땅(학 1:6)의 참상을 보고 기록해야 했습니다.
■ 본문분석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중 10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내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후반절에 사용된 6개의 동사 중에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며’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4개이고, 긍정적인 동사는 건설하고 심게 하였다는 것 2개입니다. 긍정적인 동사보다 부정적인 동사가 두 배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의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구원해 주시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강대국 바빌론에게 넘겨주시어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건설하고, 심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새로 지은 밥을 푸지 않습니다. 새로 지은 밥은 깨끗한 그릇에 푸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새로운 밥을 지으시고자 하는데, 유다는 그 구원의 밥을 담을 깨끗한 그릇을 준비해야 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깨끗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구원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을 멸망시키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고난의 때는
유다는 다른 대예언자들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북왕국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며 망하는 모습을 보고도 반면교사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그들보다 더 타락합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들한테 “너희 까불면 잡아먹는다!”하는데 쥐들이 “웃기시는군?” 하며 고양이를 조롱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꼭 이런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회개는커녕 오히려 조롱합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유다 백성입니다. 이들은 결국 바빌론에게 멸망 당해 유배생활을 합니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멸망시킨 후에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국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유배지에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아서 자신들이 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게다가 유배지에서 어느 정도 살만해지니까 이제 고향 땅으로 돌아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신앙을 가진 이들은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하나 둘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갑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아름다운 동역자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이들이 그들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여정에서 힘든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비단길만 걸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단길을 걸어갈 때에는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험한 길에 서 있다면, 신앙을 다시 세우십시오. 고난의 때는, 그것이 어떤 험한 길이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건설하고 심으시기 위한 섭리임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은 때요,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매를 든 어머니의 심정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늘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서에 따라 그때를 살고 있을 뿐이며, 결론은 ‘구원의 날’임을 기억하십시오. 아멘.*
주님, 원하지 않아도 고난이 우리 삶으로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두려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고난의 때에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다시 건설하고 세워주실 때가 있음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