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디자인하라(창조절 다섯번째주일)
누가복음 6:39~45
추분이 지나고 나니 계절의 변화가 완연합니다.
어느새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기운이 돌아 따스함이 그리워집니다. 지난주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다녀오는 길에 계절이 바뀌면서 패션도 바뀌고 있음이 실감했습니다. 요즘 패션 동향을 알려면 신사동에 가야 한다고는 합니다만, 제가 3호선 지하철과 인사동에서 느낀 패션의 변화는 복고풍이었습니다. 7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나팔바지와 트렌치코트가 유달리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도 어떤 분은 어울리고, 어떤 분은 보기에 거북합니다. 메이커나 유행도 일부분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자신에게 맞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그것을 잘 조합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맵시꾼이 될 수 있겠지요.
여성분들은 샤넬 제품 좋아하시죠?
프랑스의 샤넬 창업주 ‘가브리엘 코코 샤넬’은 여성 패션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녀는 명언도 많이 남겼는데 그녀의 명언은 많은 철학적인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변하지 않는다.”
“새 드레스를 입는다고 저절로 우아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아함은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이 공존할 때다.”
“왜 남성들이 가진 것을 탐하는가. 여성들이 가진 것 중 하나가 남성 아닌가.”
저를 쇼킹하게 한 명언은 무엇일까요?
네 번째도 약간 쇼킹했지만, 첫 번째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이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글을 좀 제대로 써보고 싶어 글쓰기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습니다. 혹시 작가를 꿈꾸는 분이 있다면 추천해 드리고 싶은 책은 성경과 그리스로마신화는 기본이고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강원국의 글쓰기>시리즈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책 서문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한 <스타일의 요소들 The Elements of Style>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종교학자 배철현 교수가 신간 <정적>이라는 책에서 추천해서 구매한 책인데 이 책을 읽다가 ‘style’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타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살펴보았습니다. 이 단어들의 의미들이 우리의 신앙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신앙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디자인하라!”로 정했습니다.
■ Style과 Design
스타일은 ‘나를 정의하는 문법’이며 ‘자신이 헌신할 수 있는 삶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스타일이 없다면, 생각은 잡념이 되고, 말은 잡담이 되고, 일은 잡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문법, 스타일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영어 ‘style’은 글 쓰는 도구 ‘pen’과 관련된 것으로 ‘펜을 통해 전달하는 이야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볼펜과 비슷한 긴 막대기가 있는데 이것은 ‘stylus pen’이라고 하지요. 이것으로 스마트폰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씁니다. ‘stylus’는 라틴어 ‘stilum’에서 왔는데, 고대 로마인들이 밀랍이 덮인 토판인 태블릿에 자신의 글을 생각으로 옮길 때 사용하던 철필이 ‘스틸룸’입니다. 밀랍 위에 쓰는 글씨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필체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필체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요즘은 자판을 사용해서 입력해서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필체’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밀랍을 씌운 태블릿에 글을 쓰려면 이전에 쓴 글이나 그림을 완전히 지우고 새롭게 글씨를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니 스타일은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일이요,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려면, 밀랍 위에 그려진 모든 것들을 다 지우고 새롭게 철필로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쓰거나 그린 것 위에 덧붙이면 요즘 말로 ‘표절’이요, 자기만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스타일은 단지 ‘필기구’ 이상의 의미로 쓰이게 되는 것이지요.
고대 프랑스어 ‘stilum’은 ‘stile’와 ‘estile’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이 패션이나 미용이라는 단어로 확대되어 사용되었지만, 본래 ‘stilum’은 ‘나를 세우는 어떤 것’이라는 뜻이고, 질서정연하게 중심을 잡아 땅에 박아 설치하다라는 뜻입니다. 막대기를 땅에 박아 세우려면 끝이 뾰족해야 합니다. style은 ‘stel’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stel에서는 style외에도 stick(막대기)과 stake[stak] (steak가 아님)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특히 ‘스타크’는 13세기 종교권력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화형시키는데 사용된 말뚝이었고, 그리하여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stauros’와 연결된 것입니다. stauros는 범죄자를 사형시켰던 커다란 막대기로 연필과 펜의 끝이 뾰족하듯 설치를 위해서는 나무의 끝이 날카로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스타일이란,
자신이 헌신할 수 있는 삶의 원칙이자 문법이고, 자신을 세우기 위해 막대기의 끝을 갈고 닦듯이 자신을 갈고 닦아서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쓰러지지 않도록 깊게 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어려우시죠? 무슨 언어학 시간 같습니다.
그런데 언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고, 수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은 스타일보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design’은 전치사 de와 sign이라는 단어입니다. sign은 라틴어 signare에서 파생한 단어인데 ‘영역을 표시하다, 자신을 남과 구별하다, 자신의 무늬를 통해 무엇을 의미하다’라는 뜻입니다. 강아지들을 산책시키다 보면 ‘영역표시’를 하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냄새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영역을 디자인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전치사 ‘de’는 뒤따라오는 단어를 표출하고 표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전치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디자인은 ‘내가 이미 지니고 있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입니다. 디자이너란, 자기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택을 디자인하고, 의복을 디자인하고, 예술작품을 디자인하는 것은 디자이너 안에 있던 그 무언가를 꺼내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흩어져있는 단어가 문법적인 배열을 통해서 作文(작문)이 이뤄지듯 디자인도 인위적이라는 뜻을 내포한 ‘作(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作(작)’이라는 한자어가 ‘인위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디자인은 고대 그리스어 ‘skedio’에서 왔습니다. 어떤 사물을 보고 ‘스케치’한다고 할 때, 스케치도 이 단어에서 왔습니다. 스케디오의 뜻은 ‘거의 근접해서, 비슷하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미완성을 내포하지만, 완성을 향해서 가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자인은 자기 안에 있는 sign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자이너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스케치 되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sign이 독창적인뿐 아니라 긍정적이려면, 자기만의 style이 있어야 하고, 스타일 역시도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자인이 ‘내가 이미 지니고 있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이라고 정의할 때에 디자이너 ‘내면에 있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창의적인 것’일 때 그의 작품도 창의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성경 본문(누가복음 6:39~45) 분석
성경 본문은 <네 눈 속의 들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은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저희 교단을 비롯한 많은 교단이 총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총회가 끝나자마자 각 교단의 총회에서 결의한 내용 때문에 한국교회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예장통합측은 명성교회 세습문제에 기가 막힌 해법을 내놓아서 불법세습하는 길을 터주었고, 기장은 총회가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총장 신임평가 문제를 놓고 더는 참을 수 없다며 장공관을 점거 농성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교단과 관련된 이런저런 소식들을 듣고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아닌 맘몬에 공개적으로 무릎을 꿇었으니 교회가 바로 서도 어려울 판에 교회가 사회보다 더 어두운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많이 우울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자신들이 맹인인 것을 알지도 못하고,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자신들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JTBC 손석희 아나운서는 앵커브리핑에서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라고 이 사태를 꼬집었습니다. 나라는 나라대로 힘듭니다. ‘내로남불’이라고, 자기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하고, 자신이 빼주겠다고 겁박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던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룩한 척하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는 ‘연기자’라는 뜻입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엄격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는 못된 열매를 맺었다’고 하십니다. 못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가 없는 법인데 너희는 못된 열매를 맺었으니 태생이 못된 나무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아는 법인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은 못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듣는 이들은 무척 부끄러워했어야 정상이겠지만, 그들은 이미 맹인인데다가 뻔뻔하고 못된 나무이므로 이런 예수님의 비판 때문에 예수님을 더욱 반대합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은 돌직구를 날립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개역 눅 6:45)”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마음의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다(표준새번역 눅 6:45).
■ 신앙을 디자인하라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온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마음(마음의 창고)’에서 온다고 합니다. 이 마음의 창고는 바로 ‘내면’이지요. 디자이너 내면에 있는 이미지가 스케치 되고, 그 스케치를 따라서 제품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완성된 제품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것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토판의 밀랍을 완전히 지우고 뾰족하게 잘 갈아진 철필로 자기만의 필체로, 질서정연하게 중심을 잡아 자신만의 문법으로 자기 안에 있는 스타일을 표현한 것이라야 합니다.
저는 신앙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스타일은 ‘나를 정의하는 문법’이며 ‘자신이 헌신할 수 있는 삶의 원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스타일이 없다면, 생각은 잡념이 되고, 말은 잡담이 되고, 일은 잡일되기 때문에 자기만의 문법, 스타일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습니다.
나를 정의하는 신앙의 문법, 내가 헌신하는 신앙의 원칙이 없다면, 신앙을 디자인 할 수 없다. 자기 안에 아무런 신앙의 문법이 없는데 무엇으로 신앙을 스케치할 것이며, 스케치한 것이 없는데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아직도 나만의 스타일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갈고 닦으십시오, 뾰족하게 만드십시오. 그리고 깊이 세우시고, 남과 구별된 자기만의 구별된 신앙의 영역을 개척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을 디자인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내 안에 이미 지니고 있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이 ‘디자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스타일을 꺼냈을 때, 100% 완전하게 모사할 수 있을까요? 스케치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100%가 없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신앙의 완성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그냥 방향도 없이 달려가는 것은 자기의 신앙의 문법, 스타일 없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목표를 하나님 나라에 맞추고 신앙생활을 멋지게 디자인하시기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