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깊은 심연(창조절 둘째주일/ 교회연합주일)
마태복음 6:9~15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은 없습니다.
20세기 대표적인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 신부는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에 공감할 수 있고, 자신의 상처를 싸매면서 아파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에 공감하고 다가가서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사역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다른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은 인간보다도 더 깊은 상처의 근원에 계셨기에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 용서 같은 주제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셨으며,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셨기에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후배 목사로부터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어느 교회로 청빙받기로 거의 결정이 되었는데, 갑자기 자기하고는 상대도 안 되는 거물급 목사가 치고 들어와서 좌절되었다는 이야깁니다. 거물급 목사가 누구인지 알면 화가 날 것 같아서 묻지도 않았는데, 교회로 담임목사 취임식 초청장이 왔습니다. 초청장을 통해서 그 거물급 목사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거물급 목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잘 알고, 오래전 일이지만 나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초청장을 찢어버렸습니다. 오래전에 그를 미워할수록 나만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서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더는 상처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경험하면서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을 뿐’이었고, 언제든지 원수갚을 기회가 오면 통쾌하게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원수사랑을 말하는 목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솔직한 심정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용서’라는 주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내가 새롭게 창조되려면 ‘용서의 깊은 심연’에 들어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게 된 심리적인 배경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두 가지는, 죄를 안 짓고 사는 것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가정, 직장, 사회, 교회 등의 생활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미성숙함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선한 의도가 상대방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무시되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우리 삶은 어느 순간 송두리째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지만, 우리 삶에서 어려움 없이 살 수 없듯이 인간관계의 갈등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쉽게 파괴적인 언어와 충동적인 행동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품에서 세상에서 살면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죄의 문제와 상처에 대해 <성공시크릿>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폴 마이어’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는 있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 다윗과 그의 아내 미갈
성경은 친밀한 남녀 간의 사이를 표현할 때 남성 중심적이라서 대부분 남성이 여성을 사랑했다는 식으로 기술합니다. 그런데 딱 한 차례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고 있었다(삼상 18:20).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여, 아버지 사울이 자객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 할 때에도 아버지를 거역하며 그 음모를 다윗을 도와 피신하게 합니다(삼상 19:11~17). 사울은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나(삼상 18:27), 다윗이 피신하고 있을 때 사울은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습니다(삼상 25:44).
훗날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미갈을 데려오는 일이었습니다(삼하 3:13,14). 보통 사람이라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자를 다시 데려와서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던 미갈을 사랑했고, 미갈도 다윗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둘 사이의 사랑은 이토록 뜨거웠던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사랑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말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남만 못한 부부 사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사이가 갈라진 것은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그날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되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오며 베 에봇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말이 베 에봇이지 속이 다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미갈은 성벽에서 다윗이 춤추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비웃습니다. 그리고 내실에 들어오자마자 힐난합니다(삼하 6:20). 한마디로 다윗의 행위가 왕의 체통을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뻐하던 다윗에게 다윗에세 거센 광풍과도 같은 노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다윗은 아내의 빈정거림에 침묵으로 응하거나 화를 가라앉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아내에게 독설을 내뱉는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의 독설은 미갈의 가장 아픈 곳, 하나님께 버림받아 적군의 손에 죽은 아버지와 세 오빠의 일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해서는 안 될 대단히 잔인한 말이었습니다. 이 독설에 이어 나오는 성경 구절은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23)”입니다. 언뜻 보면 미갈의 불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미갈과 다윗이 더는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다윗과 미갈의 문제는 서로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할 가장 아프고 기분 나쁜 말을 내뱉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극단적인 말을 피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과 미갈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묘약 = 용서
서로에게 힘들고 어려울 때 서로 힘이 되어주고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반대의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갑자기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서로 상처를 주다 파경에 이르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심리학자가 분석한 인간의 심리 중 하나가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탓하며 화풀이를 하고, 그 사람에게 내가 겪는 고통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이 어려울 때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고 행복한데도 관계가 악화하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파괴력 때문입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표면으로 떠올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 상처를 전달하면서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살면서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며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세상은 현세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상처가 있다면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깊은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면, 자신의 삶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상처는 반드시 치유해야 합니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묘약,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 본문 분석(마태복음 6:9~1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14~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은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깊은 상처를 치유하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한 만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 ‘용서’로 번역된 단어는 ‘ όφείλημα’인데 오페이레마는 ‘빚’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빚을 탕감받은 어리석은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으면서도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 용서는 자신을 위한 일
용서하지 않으면 그 마음에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 모멸감, 우울함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가득차게 됩니다. 사실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은 남들이 준 상처가 아니라 그로 인해 마음에 품게 되는 부정적인 생각들입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홧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일찍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파괴할 뿐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고 분노와 적개심을 품고 있으면 주위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 찍힙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전염성이 강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전염됩니다. 한두 번은 지지하고 격려를 보낼 수는 있지만, 계속 지지와 격려를 해줄 만한 여력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결국, 외톨이가 되고 상처는 점점 커지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을 앚는 것은 마귀에게 자기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예수님은 물론이요, 마귀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용서하는 순간이 예수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순간이요, 미워하는 순간이 우리의 마음 문을 마귀에게 열어주는 순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용서하려면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 결심을 하는 순간이 용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용서하기로 했다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다음에 나를 아프게 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했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앞으로 같은 상처를 내게 주어도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값싼 용서입니다. 용서는 내 상처의 치유를 위한 것이지, 상대방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값싼 용서와 섣부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값싼 용서’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애써 좋게 봐주는 것으로 저질러진 악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요즘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해 무조건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진정한 용서는 저지른 잘못이나 악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갑싼 용서=섣부른 용서’는 서둘러서 성급하게 해버리는 용서입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나 관계가 소원해 지면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서 즉시 갈등을 해소하고 싶어서 상대방을 성급하게 용서해 버림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용서와 화해, 일치에 대해 잘못 이해하거나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경향이 큽니다. 하지만 이런 섣부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용서는 가해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둘러서 가해자를 용서해 주면,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뉘우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 계속해서 폭력을 일삼아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계 안에서 발생한 갈등이 당장에는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성급하게 용서하지 말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란, 상처를 준 사람이 더는 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내면의 평화와 자유와 힘을 되찾는 것이며, 상처에서 비롯한 울화와 분노의 악순환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설교 초안을 잡은 후, 용서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위해서 앞에서 말씀드린 그 거물급 목사에게 축하란 보냈습니다. 바로 화답이 왔습니다. 그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가 더 는 내 마음을 휘젓지 못하게 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만 달란트 이상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기껏해야 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