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의 신앙(대림절 2주)
마태복음 13:53-5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으신가요?
대부분 사람은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는 것, 처음으로 대하는 것, 낯선 것은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익숙한 곳에서 점차로 낯선 곳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에는 설렘으로 가득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온 집을 그리워합니다. 여행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가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행이 주는 매력은 낯선 곳을 경험하는 것과 동시에 늘 익숙하게 맞이하던 일상을 낯설게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 낯섦을 대면하라
낯섦, 이것은 새로운 세계로 열린 현관과도 같습니다. 현관은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안과 밖의 경계에 있는 가물가물한 장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관’을 통과해야만 안이 되었든 밖이 되었든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현관이라고 하면, 단순히 출입구를 가리키거나 신발을 벗어놓거나 신는 장소로 여기지만, 불교에서는 첫 번째 문을 ‘현관’이라고 부름으로 현관 안으로 들어오면 ‘출가’요, 현관으로 나가면 ‘속세’로 들어가는 출발점으로 여겼습니다. 여행은 낯선 곳을 향해 현관을 나서는 행위요, 여행을 마치고 다시 현관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행위는 익숙하던 집에 대한 낯섦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삶이기 때문에 습관이 되어야 하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익숙한 것에 안주하게 되면 안 됩니다. 익숙한 신앙에 안주하게 되면 신앙의 진보가 없습니다.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감사헌금하고, 교회 봉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집짓기로 치면 주초를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주초를 놓은 다음에도 집이 완성되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집이 완성된 후에도 살림을 위해서는 다양한 물건이 필요하고, 때로는 필요하던 것들이 소용을 다해서 버려야 할 것들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리모델링을 하여 집 구조를 완전히 바꾸기도 합니다. 완전히 철거하지 않는 한 주초는 그대로 있으면 집입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집이 되는 것이지요. 신앙도 그렇습니다. 일단은 주초를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일단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그다음엔 머물러있지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갱신되어야 하고, 어제까지 나를 붙잡았던 말씀을 놓고 또 다른 말씀을 나의 신앙신조로 삼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고백했던 익숙하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새롭게 깨달아 만난 낯선 하나님을 기꺼이 만날 수 있을 때, 우리 신앙은 자라날 수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옛 언구나 방편에 지나치게 의존해 속박되는 것 경계하는 말로 늘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제까지 진리라고 생각하던 것을 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낯섦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이 따랐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 등장하는 장정의 숫자는 오천 명이었는데 여성들과 아이들까지 치면 이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 보면 ‘무리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어떠한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인 숫자만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좋아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도 숫자지만,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간절히 고대하던 메시아가 행하실 일들, 병든 자를 고치고 죄를 사해주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심으로 메시아 됨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런데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예수님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자라는 것을 봐왔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예수의 동생들과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누이들 모두가 다 고향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한동네 살았던 선후배들이 오래 알아온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익숙함이 주는 폐해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익숙해지면 편안해집니다. 거기까지는 좋은 데, 더 익숙해 지면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애할 때에는 하루만 안 봐도 안달 박달 하다가 결혼하면 신혼기에 깨가 쏟아지다가 1년이 지나지 않아 지지고 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익숙해지니까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오래 살려면 ‘낯선 사람 보듯이 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냥 농담이 아니라, 유명한 심리학자가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해서 분석한 내용입니다. 가족 간의 편안함도 중요하지만, 적당한 긴장감이 오히려 가족 간의 건강한 친밀감을 지켜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봐왔던 예수, 익숙했던 예수의 모습에서 그들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나려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한 말처럼 이전에 알고 있었던 예수를 죽였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 낯섦의 신앙
저마다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믿지만, 개인의 신앙성장 과정과 단계에 따라서 각기 다른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숲에 가면 저마다 자기의 관심사에 따라 어떤 이는 나무를 보고, 어떤 이는 꽃을 보고, 어떤 이는 새를 보고, 어떤 이는 곤충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숲을 걸었어도 누구는 보고 누구는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하거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말이든 다 맞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봄이 오는 숲에 갔는데 알밤을 주웠다든지, 겨울 숲에 갔는데 딸기를 땄다고 하면 그건 아니겠지요.
신앙은 지극히 주관적인 고백을 담보하고 있지만, 그 고백은 동시에 객관성도 담보해야 합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건강한 신앙인지 아닌지는 보통의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보통의 상식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의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단계에 접어들어 익숙해질 무렵이면, 또 다른 낯섦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속성은 살아있음으로 필연적으로 완성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하나님, 익숙한 말씀, 거기에만 파묻히지 마십시오.
진리는 낯선 법입니다. 예수와 동향이었던 사람들은 낯설게 보기를 실패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하나님은 상당히 낯선 하나님이셨습니다. 내게 익숙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셨는데, 신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기력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빵 한 조각 나눠줄 수 없는 낯선 신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맨 처음에는 많이 거부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 내게 익숙한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련과정을 거치며 낯선 하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또 익숙해지자, 또 다른 낯선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한 단계 성숙했구나, 이전에 내가 아니구나! 느끼는 순간마다 낯선 하나님은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말씀을 읽을 때 익숙하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읽던 방식에서 벗어나 낯선 방식으로 말씀을 읽기 시작하니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말씀들이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다 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낯설게 다가옵니다. 낯설어서 두렵기도 하지만, 낯설게 대함으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말씀의 진수를 깨닫는 기쁨’(쥬이상스)을 누리고 있습니다.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무엇이든지 당연한 것으로 익숙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족들을 대할 때, 낯선 손님을 대하듯이 대하십시오.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려운 사람을 대하듯, 처음 만난 사람인 것처럼 예의를 지키십시오. 많은 변화가 있을 겁니다.
저하고 여러분하고 만나지 어느덧 19개월이 되어갑니다. 이젠 익숙해졌습니까? 편안해질지언정 익숙해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머물러있는 사람이 아니라 늘 변하는 사람입니다. 주일예배에 나오는 것이 익숙합니까? 한번 마음을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늘 하던 대로 익숙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교회에 오는 것처럼, 여행지에서 낯선 교회에 가는 것처럼 예배에 참석해 보십시오. 이번 주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 수도 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해 보십시오.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도 ‘아, 그 말씀이구먼?’ 하지 마시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처음 읽는 것처럼 묵상해 보십시오. 말씀이 달라 보입니다. 처음처럼, 쉽지 않지만 익숙하지 않은 처음처럼 모든 것을 대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질 무렵이면 마지막처럼 대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을 낯설게 대하는 방법입니다.
2018년이 어느덧 20여 일만 지나면 옵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2017년의 남은 20여 일은 다시는 우리 삶에서 맞이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냥 익숙하게 보내는 날들처럼 보내버리지 마십시오. 20일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일이 몇 번이든 일어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익숙한 예수님에 집착함으로써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그 익숙함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했으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으며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낯선 곳을 여행한 뒤에 익숙하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서 더욱 성숙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듭남의 비결이 되겠습니다. 낯섦의 신앙을 통하여 거듭나는 신앙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