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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시선(고린도전서 3:1-9)

  • 관리자
  • 2017-11-09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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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시선
고린도전서 3:1-9

 

■ 고린도전서

 

고린도는 고대로부터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의 이름은 매춘업을 의미하는 ‘Corinthianize(방탕해지다)’에서 유래했는데, 고린도의 주된 신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신화를 통해 알고 있는 미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프로디테는 사실, 음탕한 사랑의 여신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주된 신으로 섬기는 도시 전체에는 신전 매춘을 포함한 성적 방종과 헬라 문화가 창궐했습니다. 헬라 문화(헬레니즘)는 우상숭배와 이원론적인 철학과 몸의 부활을 거부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상업적인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지만, 세속적인 문제들이 교회 안에 속속 들어와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분쟁, 음행, 소송사건, 혼인문제, 우상숭배 등 다양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뒤에도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었고, 그러자 세상의 것들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왔고, 그들은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에 처한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보낸 서신이 고린도전서입니다.

 

■ 복음의 창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능력으로 성품과 존재가 새롭게 변한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 그래서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라는 창을 통해 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복음의 창을 통해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거룩한 시선’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카메라 렌즈에는 다양한 필터를 착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능을 가진 필터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진이 나옵니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필터도 있고, 빛을 차단해서 셔터속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필터도 있고, 어떤 필터는 특정한 빛을 8갈래 혹은 16갈래로 표현하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같은 사물인데, 어떤 필터를 통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나옵니다. 사물은 같은데, 어떤 렌즈와 필터로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작품이 되기도 하고, 그냥 사진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나 아닌 세상의 변하지 않음에 실망하며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도 타인도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변화에 대하여 침묵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타인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 이전에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썩은 흙만도 못한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울이었을 때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것을 보면서 마땅히 여겼지만(행 8:1), 바울이 되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합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변한 것이지요. 세상의 창을 통해서 볼 때에는 어리석었던 일이, 복음의 창을 통해서 보니까 목숨 걸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떤 창을 통해서 보느냐?’, 시선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 육신에 속한 자

 

3절 말씀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시기’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3절에 나오는 시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ζήλος(젤로스)’인데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열심, 열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시기와 질투’로도 사용됩니다. 본문의 ‘ζήλος’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시기하고 질투하는데, 아주 열심히 열정적으로 시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기의 근원은 비교입니다. 비교하다 보면 반드시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사람은 본능에 따라 자신보다 잘나가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면 깎아내리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뒷담화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뒷담화가 인류의 문명발달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고도 합니다. 뒷담화를 통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이에 동조하는지에 따라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시기’라는 감정은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속해서 싸워야 할 괴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985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아마데우스>가 있었습니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를 시기했던 요세프 2세의 궁정음악장 살리에르의 이야깁니다. 영화이기 때문에 실재와는 차이가 있지만,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해도 절대로 천재 모차르트를 따라잡을 수 없는 평범한 사람 살리에르는 맨날 빈둥거리면서도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진 모차르트를 살릴 수 있었음에도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죄책감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가 이런 절규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원했던 것은 오직 당신을 찬미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선 제게 갈망만 주시고 절 벙어리로 만드셨으니 왜입니까? 갈망은 심어 주시고 왜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이 훨씬 더 경건하고 훨씬 더 치열하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잘 나가고 인정받는 모차르트, 그의 천재성을 보면서 좌절하는 살리에르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요? 분명히 내가 잘 나가는 친구에 비해서, 동료와 비교하면 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은 흥하고 나는 쇠한다면 어느 누구의 감정이 멀쩡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이 생기면 우리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심이라는 것은 무서운 독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시기심에서 벗어나려면, 식상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가득 채워가는 훈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제자로서 자기 안에 거짓 신들을 없애고 싶다면 예수님으로 가득가득 채워라! <거짓 신들의 전쟁> 카일 아이들먼

 

남신도 여러분은 이 구절이 익숙하시죠? 예, 남자화장실에 붙어있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시선’을 가지려면, 먼저 우리는 ‘시기’라는 안경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 하나님의 시선

 

고린도교회 교인은 각기 아볼로파, 바울파로 나뉘어 분쟁을 일삼았습니다. 아볼로나 바울은 각기 다른 은사가 있었고, 이 다른 은사 덕분에 협력하여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동역자였던 그들을 교인들이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세속적이고도 세상적인 기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런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육의 사람’이요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꾸짖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의 특성상 고린도교회가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힘을 합해도 부족할 판에 편 가르기나 하고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이야깁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편 가르기가 없어야 합니다. 그 어떤 형태의 편 가르기도 신앙적인 성숙을 위해서는 없어야 합니다. 남녀, 세대, 직분, 사회적인 지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힘입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기독교처럼 혐오와 편 가르기를 통한 배타성이 강한 종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자신의 뜻을 합리화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을 때 사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막 8:33).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나무를 심는 사람(장 지오노)

 

5분 정도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 요약본입니다.

씨앗 만개를 심어야 겨우 백 그루 정도의 나무가 살아남습니다. 그래도 늙은 양치기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나무 씨앗을 심습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평생에 걸쳐 정성스럽게 씨앗을 심고, 한 그루 한 그루 가꾸었더니, 황무지 프로방스(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가 낙원으로 바뀌었고,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늙은 양치기 할아버지는 황무지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래와 바람’밖에 없는 황무지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거룩한 시선은 ‘숲’을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십만 개의 씨앗을 허비하면서도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의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길가와 돌짝밭과 가시덤불과 옥토가 그것입니다. 삼심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은 밭은 옥토뿐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단순히 ‘옥토가 되자’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소비되는 씨앗도 있기 마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뿌린 씨앗이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해도, 옥토가 아닌 다른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은 결과가 올지라도 씨뿌리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거룩한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런 시선을 가진 이들은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면서 묵묵히 심고 물을 줍니다. 자기가 물을 주었다고, 심었다고 내세우지 않고, 물을 주는 일이 더 중한지, 씨앗을 뿌린 일이 더 중한 것인지 다투지 않습니다. 오로지 동역자일 뿐이지요. 이것이 ‘거룩한 시선’을 가진 이들이 만들어내는 기적입니다.

오늘 함께 한남제단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 ‘거룩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맡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이라면 반드시 큰 결실을 볼 것임을 믿으십시오. 한 주간 동안, 거룩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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