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 즐거움
시편 149:1-9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즐겁습니까?
제가 중학교 때, 어느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저마다 대답하는데 자기가 잘하는 과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영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학생의 영어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좋아할 수 있는 거지. 왜 웃니?”.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악기를 잘 다루지 못해도 음악을 좋아할 수 있고,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도 미술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뭔가를 잘해야만 그것을 좋아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시험을 보면 점수가 좋았던 과목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해도 예수님을 좋아할 수 있고, 신앙이 좀 부족해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즐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 혹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사람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초신자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마냥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재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은 즐겁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하다 보면, 잘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니, 여러분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아가기에도 짧은 삶입니다.
■ Play(놀이)와 Pray(기도)
마가렛 귄터(Margaret Guenther)의 『Holy Listening(거룩한 경청)』이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Play(놀이)와 pray(기도)라는 말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나는 자판으로 “이것에 대해 기도해 봐야겠어”라는 말 대신 “이것에 대해 놀아봐야겠어”라고 잘못 쓰며 깨달음을 얻는다. 기도와 놀이를 연결하는 것은 곧 명상하는 삶과 놀이를 연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구절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은 흔히 의무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한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라고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했고, ‘고난의 삶’에 동참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삶’과 ‘즐거운 삶’을 다른 개념처럼 인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출발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예수님처럼 고난 속에 죽어갔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 바울, 스데반 뿐만 아니라, 중세시대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이들이 온갖 고문과 화형을 당하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과 고난은 친구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이 신앙을 지키다 고문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고문이 극렬해지면 극렬해질수록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급을 기뻐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마가렛 귄터의 『Holy Listening(거룩한 경청)』이라는 책을 읽은 후 ‘신앙이 놀이라면?’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어떤 이는 ‘소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소풍과도 같은 것, 잠시 이 세상에 소풍왔다가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어른이 되어서는 ‘소풍’의 감동을 잊고 살지만, 어릴 적에는 ‘소풍’을 가기 전날 설렘으로 잠을 설치곤 합니다. 이렇게 인생, 하루하루는 설렘의 연속일 수 있으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이야기지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첫 번째 행하신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셔서 잔치 내내 흥겹게 잔치를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큰 주제는 ‘하나님 나라는 잔칫집’과 같다는 말씀이며, 이 잔칫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뜻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통합니다.
■ ‘신앙이 놀이라면?’
학원과 학교에서는 껌뻑껌뻑 졸던 아이들도 노는 시간이 되면 눈이 말똥말똥해집니다. 눈이 맑아집니다. 어른들도 놀기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놀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노는 시간을 만듭니다. 왜? 노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놀이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놀이가 있고, 나쁜 놀이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놀이는 그런 점에서 보면 좋은 놀이보다는 나쁜 놀이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잔인한 컴퓨터게임을 즐기고, 어른들은 도박을 즐깁니다. 돈이 많이 들어가면 고상한 놀이라 생각하고, 비용이 적거나 들어가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는 놀이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맘몬(자본)의 장난입니다. 맘몬의 놀이에 노리개가 된 사람들은 제대로 놀 줄을 모릅니다.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이 인생도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제대로 노는 일은 돈과 큰 관련이 없습니다. 돈 없이도 아주 즐겁게 놀 수 있으며,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즐겁게 논 뒤에 허망함이나 헛헛함도 없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놀줄 아는 것입니다.
‘춤의 왕’이란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내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때에도 하늘의 춤을 추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 너 인도 하련다.
오늘 함께 읽은 시편 149편 3절 말씀을 보면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 지어다.”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의무지만,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십니다.
신앙이 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놀려고 계획을 세울 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즐겁습니다. 설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이렇게 즐겁고, 설레야 합니다. 그 감격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이를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재미있습니까? 온 힘을 다해서 몰두해야 재미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놀다 보면 추운 줄도 모릅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교회에서만, 주일날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삶은 항상 기쁜 것입니다.
■ 놀이의 규칙
놀이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그냥 막 노는 것이 아닙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사방치기, 술래잡기 모두 규칙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은 더 재미있게 놀이를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규칙도 우리를 옭아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기본정신을 벗어난 율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옭아매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조차도 구원에서 먼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며 분노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만든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깝게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막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규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읽은 시편의 말씀 중에서 4절의 말씀에 나오는 단어 ‘겸손’을 꼽고 싶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그들의 목을 꺾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 자연 앞에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존중합니다. 자신과 이웃과 자연과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미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뤄졌으니, 모든 일이 즐겁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단절입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 한 일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을 단절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단절시키고, 자신과 자신을 단절시킨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절되었던 관계들이 회복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것요, 산다는 것은 축제입니다.
그러나 잔치를 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공기 놀이를 하려면, 공기놀이하기에 좋은 자잘한 돌멩이를 미리 주워야 합니다. 소풍을 가려면 김밥도 싸야죠. 자치기를 하려면 나무를 깎아야 합니다. 놀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신앙도 놀이처럼 바꿔가려면 기본적인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일 성수, 말씀 묵상, 기도, 전도, 십일조 이런 것들입니다. 물론, 거기에만 파묻히면 ‘신앙의 놀이’라고 할 수 있는 진수에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것들을 무시하면, 신앙의 놀이판 자체가 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상호보완적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지키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신앙의 경지. 그래서 신앙이 족쇄나 의무가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멍에를 내려놓고 쉬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신앙은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믿는 즐거움
신앙생활은 즐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주는 즐거움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그 끝에 허무함이 찾아오고, 삶의 회의가 자리하고 헛헛하지만, 신앙의 즐거움은 영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앙의 즐거움은 느끼면 느낄수록 더 커집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이만큼인 줄 알았는데, 신앙이 자라나면 이전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즐거움은 세상이 알 수 없으므로,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고,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이런 신앙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삶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신앙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도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의 비록 짧아도 의미 없지 않으며, 매우 살아갈 만하며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 단절된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힘쓰십시오. 시편 149편 5절에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 지어다.” 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도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즐거움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