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반응하라
요한복음 5:1-9
■ 베데스다 연못
1888년 한 고고학 발굴단이 예루살렘 유적을 탐사하다가 지하에서 자그마한 인공연못을 발견합니다. 다섯 개의 기둥이 있는 지하 연못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은 그곳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친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연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 위를 동하게 하는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연못 주변에는 많은 병자가 모여들어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이 은혜로운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은혜로운 곳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연못가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연못가에 모인 병자들은 동병상련이라고 그리 어렵지 않게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요하던 연못이 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베데스다 연못가는 먼저 물에 들어가려는 이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병자들이 필사적으로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려고 밀고 당기고 치고받았을 것이니 과연 은혜로운 곳이었을까요? 하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병자들을 모아놓고 심심하면 한 번씩 물을 휘저어서 병자들이 아귀다툼하는 것을 보고 즐기신 분이셨을까요? 오히려 그곳은 사탄이 인간을 우롱하고 유혹하는 자리가 아니었을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변상련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밀치고 싸움을 해야만 하는 현장이 과연 은혜로운 곳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현실
오늘 우리는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뭔가 한 방 터뜨리면 엄청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것을 쫓아 끝없이 경쟁합니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사회에서는 실력자만 인정을 받습니다. 일등이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도 무시당하기 마련입니다. 경쟁사회에서는 남을 배려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없이 만나면 서로 따뜻하게 대할 수 있지만, 이해관계가 형성되는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자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런 경쟁사회는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전처럼 들리기 마련입니다. 분주함이 ‘천박한 호기심’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면, 무한경쟁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아픔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38년 된 병자, 그의 약한 몸으로는 도저히 경쟁자들을 제치고 물에 먼저 들어갈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고백한 대로, 그는 비록 베데스다에 왔지만, 치료는 포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두 살 때 그곳에 왔다면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겼을 것이고, 최소한 10대 이후 그곳에 왔을 것으로 유추해 보면 환갑의 나이를 이미 훌쩍 넘긴 나이일 것입니다. 당시 평균수명을 생각해 보면, 이제 거의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나이가 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냥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는 이제 그곳도 떠나지 못합니다.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곳에 왔을 때에는 병을 고치겠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열망은 사라지고, 오히려 하루하루 구걸하여 먹고사는데 이력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38년 된 병자는 현실의 고통과 허무를 알면서도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고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사회에 살면서 우리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살아갑니다. ‘다 그런 거지’ 하면서 세상의 불의함에 대해서 눈감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 양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베데스다 연못과 다르지 않습니다.
■ 예수님의 찾아오심과 병자의 반응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병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3절의 모습처럼, 나병환자의 병든 몸을 직접 만지며 치유하실 만큼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은 병자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직 그 38년 된 병자만이 예수님의 “낫고자 하느냐?”는 말씀에 반응합니다.
이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38년이라는 긴 세월에도, 여전히 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저냥 38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치고 싶은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8년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절망스러운 불치의 병을 앓던 병자에게는 안식일에도 안식이 없었으며, 명절에도 기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 질문은 “온전케 되기를 원하느냐?”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에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병자는 이 질문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낫기를 원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낫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병 고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병이 낫는 순간부터 그동안 받아오던 동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정관념이나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경쟁사회를 사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쉬는 날에도 쉼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회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누구는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서도 몇조를 벌어도, 똑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임금차이가 극심해도, 대기업 상품의 수출을 위해서 농수산물값이 폭락해도, 경쟁에서 뒤처졌거나 혹은 이겼으므로 당연히 자신들이 받아야 할 몫을 받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경쟁사회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고 대물림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또한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지만, 38년 된 병자 외에는 냉담했던 병자들처럼 세상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불행입니다.
■ 38년 된 병자의 상징
38년 된 병자를 당시 유대인들의 정신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눈먼 사람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다리를 저는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행하지 못했습니다. 온몸이 마비된 사람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기력하였으며, 벙어리처럼 진리를 말하지 못했고, 귀머거리처럼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총체적인 위기는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을 양산해냈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한국에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해 기독교가 들어왔으니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13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올해는 1517년에 있었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개혁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여전히 눈먼 사람들처럼, 다리를 저는 사람들처럼,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또한, 우리는 그러한 것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머물러 있었던 병자를 통해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 세 가지 명령
예수님은 병자에게 세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첫째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38년된 불구자에게 “일어나라!”는 명령의 말씀은 엄청난 도전과 모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리어 동사 ‘엥겔리레’는 부정과거형인데, 과거를 부정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미적거리지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면 신앙적인 결단을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내 자리를 들고”입니다. 자리는 매우 가난한 사람들의 침구로 짚으로 만든 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거적을 드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거적이 의미하는 바는 보잘것없는 것이고, 그것을 드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말씀에 순종하면 보잘것없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큰 역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역사를 이뤄가는 큰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셋째, “걸어가라”입니다.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해석하면 “계속해서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병자의 걷는 행위는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새로운 생활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온전케 될 것입니다. 병자는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만, 혹은 일시적으로만 걸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평생 계속 지속해야 합니다.
“일어나라, 내 자리를 들어라, 걸어가라!”이 세 가지 명령이 병자를 온전케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가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에 반응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 말씀에 반응하라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듣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상을 통해서, 만나는 것들을 통해서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이 성숙을 이루지 못하고 퇴보한다면, 말씀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반응하십시오.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했던 38년 된 병자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고치고 싶고, 온전해지기 원하신다면, 말씀에 반응하십시오. 말씀에 반응한다는 것은 모험이요, 도전입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 성숙한 신앙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한 주간,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살아가시면서 여러분의 삶이 온전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