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창조절 일곱째 주일)
고전 15:31-34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0월의 한복판입니다. 남도의 들판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설악산은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계절의 변화가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데도 우리는 시간에 쫓기며 분주하게 살아가느라 자연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분주함’, 이것은 어쩌면 도시인들의 만성질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리저리 채이면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살아가다 보니 영혼은 메말라 갑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문득 돌아보면 외롭고, 쓸쓸하여 외톨이가 된 것만 같습니다. 남들은 다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힘든 것 같고,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시인들은 ‘외로움’ 찾아오면 그냥 울어 주라고 조언을 합니다. 울다 보면 제 우는 소리에 더 슬퍼지기도 하지만,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펑펑 울고 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6장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에 의하면, 울음을 통해서 우리 삶을 힘겹게 하는 두려움과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호승 시인은 ‘울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울지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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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정호승 – ‘수선화’에게 일부>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외롭고, 심지어는 산천초목도, 하나님도 외로운 법이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시 한 편의 사색을 통해서도 우리는 성숙을 이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분주함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는 것을 회피하게 합니다.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인데 괜히 골머리 썩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거나 TV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나 스포츠 같은 것에 빠져듭니다. 그러다 보면 골치가 아픈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영적인 나태함에 안주하게 됩니다.
■ 태만, 나태 = 아케디아akedia
성경에서 말하는 죄 가운데 하나가 ‘태만’ 혹은 ‘나태’입니다. 태만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이 병들어서 의욕과 활기를 잃은 상태, 잔뜩 주눅이 들어서 의기소침해진 상태입니다. ‘나태’는 헬라어로 ‘아케디아akedia’라고 하는데, ‘관심’을 뜻하는 케도스kedos와 ‘없다’는 뜻의 아a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케디아(태만, 나태)는 자기와 관련된 것을 빼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다른 일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연예인이나 공직자 등의 사생활이나 스포츠, 오락 등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것을 ‘천박한 호기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회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모른 체하는 것,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케디아’는 곧 영적인 태만이나 나태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약자에게 공감하기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단순히 윤리적이거나 도덕적, 법률적인 죄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는 상태가 죄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도 단순히 어떤 형상을 섬기는 것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에게 팔린 영혼은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악행이요, 다른 하나가 태만(나태)입니다. 태만이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주함 속에 파묻히게 되면, 자기의 외로움 하나도 견뎌내기 힘겹고, 그 외로움조차도 ‘천박한 호기심’으로 이겨내고자 한다면, 자기의 문제는 고사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에 대해 눈을 감게 됩니다. 내 삶도 불안한데, 오지랖 넓게 약자의 편을 들다 손해 보지 말고, 강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이익이겠다는 은밀한 유혹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면 안 됩니다. 성경은 늘 억압받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선포나 예수님의 삶이 그 증거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무시하고,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는 순간부터 교회의 몰락은 시작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국교가 되면서 억압받던 종교에서 지배하는 종교가 된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200년 가까운 암흑의 시대를 거쳐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교회는 몰락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여전히 교회가 고통받는 이들과 사회적인 약자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에 섬으로 지금도 교회와 신앙인들의 신앙이 흔들렸으며 영적인 나태함에 빠져 살아가는 죄를 점하는 것입니다.
■ 유로지비 yurodivy = holy fool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나 죽노라”고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상징적인 내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속에서 시도때도없이 일어나는 욕망이나 원망, 절망, 좌절, 두려움 같은 것들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인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진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파선 당하고, 바다를 표류하기도 하는 위험 속에서 언제든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는 죽음의 문 앞에 있습니다.’라고도 번역합니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위험한 상황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요? 좋은 배경과 학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평범하게 살고자 했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서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바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삶의 신비를 깨달았기에 기꺼이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신비는 이렇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할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러시아어 중에서 ‘유로지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도스프예프스키의 <까마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등장한 단어인데 지금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바보짓과 광대 짓,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 정상인이 들을 수 없는 신의 음성을 듣고 이를 인간에게 전하는 특이한 성인 남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의 음성에 순종하므로 세상적인 이익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거룩한 바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유로지비’의 삶이 아니었는가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을 위시한 신앙의 선배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왜 뻔히 보이는 고난의 길을 피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세상의 불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건져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부터 새롭게 눈을 뜬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이전의 것들은 모두 분토처럼 보였고, 영원한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리고 나니,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사람다운 삶, 참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바울은 자신을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은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을 다 바쳐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전했던 말씀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바울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그 이후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목표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각오로 복음전파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바울이야말로 ‘유로지비’였던 것입니다.
■ 깨어 의를 행하라!
이 부분을 표준새번역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은 분주한 일상에 파묻혀 영적인 나태함에 빠진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정신을 쏙 빼놓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은 우리를 소비라는 쳇바퀴에 가둬놓고 돌려서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습니다. 열심히 살아가긴 하는데 뭔가 헛헛합니다. 이 헛헛한 외로움을 이겨내려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똑바로 정신을 차리는 일이요, 깨어있는 일’입니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죄와 결별합니다.
바울은 “악한 동무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합니다. ‘악한 동무’는 우리를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도록 유도하는 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입니까,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가깝게 인도하는 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누군가의 동무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떤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전파의 동역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척박한 이 세상에 기쁨과 감사, 사랑과 정의, 평화와 일치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나태한 몸, 굼뜬 몸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이기주의라는 자기라는 감옥에 갇힌 채 외롭게 살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축제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 일을 위해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