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어디서 오는가?(창조절 5주)
출17:1-7/빌 2:1-13 / 마 21:23-32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분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실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흔히 설교자에게 ‘말씀의 권위’가 있다고 하는데, 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므로 오는 것이지, 설교자의 언변이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30분 설교를 위해서 준비하는 원고는 200자 원고지를 기준으로 30매입니다. 그런데 제가 신대원에서 학생들과 세미나 할 때, 3시간 강의를 위해서 준비하는 원고는 200자 원고지 10장이 채 되지 않습니다. 강의할 때에는, 몇 가지 주제를 정해놓고 학생들의 반응에 따라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원고대로 강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30분 설교준비가 3시간 강의를 준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질의와 응답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강의는 내 생각을 말해도 되지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위해서 인간의 여러 가지 수식어들이 붙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어려움이고 동시에 설교가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저 설교자의 생각을 전하고, 만담이나 하고, 청중을 웃기고,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하고 제목만 정해놓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말씀을 전한다고도 하는데 그러다가는 악령의 지시를 따르기 딱 좋습니다.
■ 교회력에 따른 본문
오늘의 구약말씀은 출애굽기 17장 1-7절, 빌립보서 2:1-13. 마태복음 21:23-32절의 말씀입니다. 먼저 출애굽기의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는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호렙 산 반석으로 부르셔서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13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겸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결과 모든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때 우리는 흠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말씀 마태복음 21장 23-32절은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가르치느냐?”, 이에 대해 예수님은 반문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러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더니, “알았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았고, 둘째는 “싫습니다”하고는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는 둘째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소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하는 너희는 대답만 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맏아들 같고, 너희가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둘째 같으니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느냐?”
■ 교회력의 중심 주제
저는 교회력의 공통주제를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로 보았습니다. 출애굽기의 본문을 보면,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자 백성이 모세와 다툽니다. 출애굽을 이끈 지도자 모세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반석을 쳐 물이 나오니, 다시 백성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력이 생겼습니다. 지도력이라는 것은 권위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빌립보서는 낮아짐, 섬김, 겸손을 통해서 예수님 앞에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끊임없이 낮아지심으로부터 기인했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도 그런 맥락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권위를 힘입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력의 공통주제는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이고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목회자들이 쉬는 날입니다. 쉬는 날이면, 저는 친구 목사님들과 만나 다음 주 교회력을 놓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같은 본문을 놓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제가 세 본문의 주제는 ‘권위에 관한 문제’라고 하자, 다른 목사님들은 ‘겸손에 관한 문제’라고합니다. 모세와 다투던 백성이나 빌립보교회 교인이나 대제사장과 장로들 모두 교만함으로 인해 초심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참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순종함은 ‘겸손’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 겸손과 교만
무엇이 겸손입니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런데 잠언 18장 12절 말씀에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하십니다. 잠언 11장 2절에서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교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겸손에 관한 말씀도 많은데, 베드로전서 5장 6절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십니다.
교만이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내가 기준이 되면, 내 눈에 차지 않으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못되었다고 정죄합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해?’하는 마음이 자라게 되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름’과 ‘틀림’은 같은 말이 아닌데, 교만하면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도 안 되고,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틀린 것은 바로잡아주어야 하지만, 다른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겸손은 사람의 마음을 넓게 만듭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자연스럽게 성숙한 사람이 되고, 성숙한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존경받습니다. 창조절에 이런 성숙을 이뤄가시길 바랍니다.
■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겸손’하라고 하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겸손은 ‘예스 맨’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네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가르치느냐?”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교만했습니다. 좀 더 겸손한 자세로 가르치겠습니다.”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당연히 권위 있게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둘째와 같은 세리와 창녀가, 말로만 번지르르한 너희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이시지만, 교만한 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 앞에서는 서슬 퍼렇습니다.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하고, 강한 자 앞에서는 비굴한 것이 세상 풍조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약한 자들 세워주고, 아무리 강한 자라도 불의한 길을 갈 때에는 당당하게 꾸짖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던 대제사장과 장로가 빠져있은 함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도, 창녀와 세리도 자기들보다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교만했고, 자신들의 판단기준에 따라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자기 의에 빠져 사는 대제사장과 장로가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런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눈을 번뜩이며 예수님을 모함하려고 함에도 예수님은 권위 있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에 순종함입니다.
■ 겸손하고 당당하게
저는 이것이 다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지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드럽지만 강해야 합니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고 올라오는 부드러운 새순을 보십시오. 단단한 씨앗을 뚫고 올라오는 연한 새싹을 보십시오.
잠언 3장 34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밝히면서,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십니다. 그 외에도 겸손한 삶이 받는 복에 관한 말씀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의 설교도 참된 권위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신앙인들도 권위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겸손해집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삶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문제로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그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무엇이 있습니까? ‘내 마음과 달라’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과 다르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이 내 생각과 다른 것이 서운하고 섭섭합니다. 이러한 것이 개인사를 넘어서 사회 문제화되면, 그것이 이념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떤 주님의 얼굴을 봐야겠습니까?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로워하는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 깨닫게 됩니다.
구원이 감격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희망없는 삶이었으며, 구원밖에 있는 삶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면 그 높임은 영광이 될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