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의 기적(창조절 셋째주일)
요한복음 6:1-15
가을의 기운이 완연합니다. 창조절 셋째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의 가정과 삶에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하셔서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 섭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 오병이어의 상황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큰 무리의 숫자는 오늘 본문에 오천 명쯤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사람이 숫자를 셀 때에 장정 남자만 세었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치면 적어도 1만 명이 넘는 숫자입니다. 고대 갈릴리 지방에는 204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가장 적은 마을인구는 15,000명쯤이었고, 전체 인구는 25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거의 한 동네에 해당하는 이들이 따라다녔다는 말이니 그야말로 ‘큰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병자들에게 행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랐던 큰 무리를 병 고침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었고, 의료라고 하는 것이 열악했던 당시의 상황과 병은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던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많은 이들이 따랐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병자들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던 사람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혹시 먹을 것을 얻을까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약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큰 무리를 이루며 이동을 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와 그들의 꼭두각시였던 헤롯을 위시한 권력자들은 그들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불순세력으로 보았습니다. 그들로부터 예수를 분리하고, 그들을 선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치게 한 것은 결국, 지배권력의 체제유지를 위한 방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명절 유월절이 가까워지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순례하는 순례자들의 무리까지 더해지고, 메시아를 기다리며 로마식민지에서 하루속히 독립하고자 했던 이들은 예수 곁으로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15절의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를 임금으로 삼아 로마제국과 그에 부역하는 이들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 삶의 기본적인 문제
예수님께로 모여든 사람의 목적은 제각각이었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이들,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혁명을 꾀하고자 하는 이들 등등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어도 ‘배고픔’의 문제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이슬을 먹고 살 수도 없으며, 의미를 먹고 살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 앞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것’을 먹느냐는 나중의 문제이고, 당장 생존을 위한 ‘배고픔’의 문제 앞에서는 너와 나가 다를 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누리는 것들에게 자유롭지 않습니다. 특히,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주’를 위해 일하고 구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면 ‘기복신앙’이라고 몰아붙이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복신앙이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기복적이지 않은 기도는 없습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기복신앙은, “내가 잘 된 후에, 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면서, 지금 여기서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단,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주시면 하겠다’가 아니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겠습니다.’인 것입니다. 삶의 기본적인 문제들과 자신과 가족과 교회를 위해 복을 구하는 기도를 이기적인 기도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기복적인 기도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구하십시오. 구해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생각
예수님은 제자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성경은 이 질문이 빌립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니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빌립의 생각에는 이백 데나리온은 더 있어야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합당한 같지만, 이백 데나리온이 있으면 해결될까요?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최근 최저임금이 7,530원입니다. 8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60,240원입니다. 여기에 200을 곱하면 12,048,000원입니다. 최소한으로 잡은 금액입니다. 오늘날처럼 제빵소나 음식점이 넘쳐나고 배달서비스가 잘되어있어도 1,200만 원어치를 주문하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 당시에 그 돈이 있은들, 그곳에 모인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빌립의 생각은 합리적이었지만, 그 합리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이런 ‘합리성’이 아니었습니다. 제자 안드레가 예수님에게 여쭙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거기에 안드레도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을 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 그렇지만, 빌립과 안드레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빌립은 불가능을 염두에 두고 판단하고 있고, 안드레는 가능하진 않겠지만, 무슨 방법이 없는지 예수님께 여쭙니다. 매우 큰 차이입니다. 인간적인 합리성에 비추면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이시라면 그 합리성을 뛰어넘는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다는 믿음이 안드레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기적이란 무엇입니까? 합리적인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 기적입니다.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생각이 부질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합리성 너머에 있음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음, 보이지 않음, 그러나 마치 보이는 것처럼 믿는 것,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에 대한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 예수님의 손에 들리어지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리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축사하시고, 떡과 물고기를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주라고 하십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베푸시지만, 기적의 시작은 한 아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방식입니다. 한 아이에게 그 정도면 몇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양입니다. 한 아이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양입니다. 그곳에 모인 큰 무리에게는 작은 것이었지만, 한 아이에게는 작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적의 이야기를 읽을 때 ‘작은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한 아이에게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으며,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 아이의 전부는 어른들이 볼 때에는 ‘보잘것없는 것’일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아이에게는 전부였던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들은 두 렙돈에 집중하지만, 예수님은 ‘전부’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한 아이는 ‘전부’를 바쳤고, 그것은 예수님의 손에 들리어졌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교인들의 호주머니에만 관심이 있는 거짓 목사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믿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큰 기적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에 제자들에게 내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셨고, 그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은 그것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부’라는 의미는,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모습 그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찬양처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 부스러기의 기적
예수님은 큰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후에 남은 조각, 즉 ‘부스러기’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것을 다 거두었더니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증언합니다. 장정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은 것도 기적이지만,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는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더 큰 기적은 ‘남은 조각, 부스러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조각, 부스러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버려도 되는 것, 하찮은 것, 소소한 것, 없어도 되는 것’ 정도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어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쓸만한 것을 골라내고 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쓸만하지 못한 것’이 부스러기입니다.
우리 한남교회에서도 후원하는 ‘부스러기 선교회’가 있습니다. 저는 이 이름이 참 좋습니다. ‘당신에게는 없어도 되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모여져서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이런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내게는 쓸모없는 것이고, 흔한 것이고, 소소한 것인데 그 누군가에게는 평생소원이기도 하며, 살아생전 이루지 못할 것들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늘이 ‘단 하루만 더!’ 간절한 소원의 날이었지만, 오늘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어떤 이들은 하루가 너무 길다며 무료하게 보내고, 허망한 일로 오늘을 탕진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부스러기 같아서 헌신을 망설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로 봉사하라고 하면, 노래를 못해서 못한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라고 하면, 성경지식이 부족해서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남은 조각,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이 모여서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나보다 더 못난 혹은 신앙적으로 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감싸주어야 합니다. 한 아이에게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몇 끼를 해결할 수 있는 큰 것이었지만, 큰 무리에게는 ‘부스러기’보다도 못한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잘것없는 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니 부스러기만으로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 결론
정리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땀 흘려 일하고,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기도입니다. 둘째로, 합리적이라고 하는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이 기적입니다. 신앙은 지극히 합리적이지만, 종종 합리성 너머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틀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셋째로, 주님은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넷째로, 보잘것없는 것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완벽한 것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남은 조각, 쓸모없는 부스러기와도 같은 것들로 기적을 만드십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대단한 분들이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부스러기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 양면성 앞에서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리어져서 기적이 일어나고, 그 기적을 함께 체험하는 한남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