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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2) - 공감

  • 관리자
  • 2017-07-23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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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 - 공감
로마서 12:14-21 / 마태복음 11:16-17

 

2001년 제주도 종달교회에 부임하여 첫 번째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집사님 한 분과 아이들 성경학교 때 줄 선물을 사러 제주시 문구도매점에 나와서 이런저런 선물을 샀습니다. 선물을 다 산 후에 잃어버린 만년필과 같은 만년필이 있길래 한 자루 샀습니다. 저는 지금도 설교준비를 할 때 펜촉이나 만년필을 이용해서 초안을 잡는데, 잉크 냄새와 서걱거리는 느낌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 당시 5만 원 정도 하던 파카만년필이었는데 망설임 없이 만년필을 사는 나를 보면서 집사님이 “어휴, 엄청나게 비싸네요.” 합니다. “집사님, 이건 보급형이라 싼 거에요. 비싼 건 몇십만 원짜리도 있고, 백만 원 넘는 것도 많아요.” 했더니만 “어휴, 뭐 그리 비싸데요?”.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해가 뜨면 밭으로 나가 해질 때 들어오는 하루 일당이 3만 원이었습니다. 그것도 매일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날 쉬고, 주일 쉬고 하면 한 달에 6-70만 원 남짓 법니다. 교인들은 온종일 뙤약볕에서 뼈 빠지게 일해서 받는 일당으로 감사헌금도 하고 십일조 헌금을 하고, 그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그 헌금으로 목사는 먹고사는데 일당보다도 비싼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년필을 사는 데 사용했다는 것이 철딱서니 없는 짓 같았고, 그 집사님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서 너무나 죄스러웠습니다. 내가 만일 그 집사님처럼 일당벌이로 먹고사는 처지였다면, 만년필을 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의 미안함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때 저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고, 지금도 교역자들은 교인들의 헌금을 통해서 먹고산다는 점에서 여느 사람보다 검소한 소비생활을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회재정도 허투루 사용되지 않게 하여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게 해야 헌금을 한 분들이 복 받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대화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사님의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세상

 

저는 오늘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가 각박한 이유는 공감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이 아파해도 공감하지 못하고 나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로 선을 긋습니다. 나와 너는 다르다고 생각하니 타인을 함부로 대합니다.

한 예를 들어볼게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당황한 적이 있을 겁니다. 저는 제가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총각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41살이 되던 해부터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만 몇 년 전부터는 아버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더니만 급기야는 ‘할아버지’라는 강펀치를 맞았습니다. 흰머리가 제법 희끗희끗하니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호칭이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었던 일들입니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호칭 때문에 불쾌감을 넘어 모욕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먹사’라거나 ‘개독교’라고 도매급으로 넘어갈 때가 그렇습니다. 이처럼 ‘호칭’은 듣는 이에게 큰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사회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바로 이 호칭에 모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최근 뉴스들을 보면 이런 문제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평생 밥 한 번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여성 국회의원에게 ‘밥하는 아줌마’로 불린 급식, 조리노동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단체행동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미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운전이라는 노동을 제공하고 급여를 받는다는 이유로 ‘새끼야’로 불리고, 심지어는 부친까지 ‘놈’자로 불려야 했습니다. 노동자 그 당사자들의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욕설을 퍼부었던 그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들에게는 한없이 교양있고 자상했을 것이며, 자기 부모에 대해서도 온갖 효도를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런 막말을 막말인 줄도 모르고 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감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공통적으로 자신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른 것이라 구분 짓고,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태도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공감능력이 떨어져 갑질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예수님의 말씀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이 세상은 점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아픔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기 자녀나 부모에 대해서조차도 공감하지 못합니다. 유난히 자녀 학대가 많아지고, 부모에 의해서 타살당하는 아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공감능력을 상실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로마서 본문의 중심내용

 

오늘 본문인 로마서에서도 이 공감능력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고 권고합니다. 이런 공감능력은 박해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게 하며(14),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이 ‘선한 일’(17)이며, 이렇게 공감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19)주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박해하는 자들조차도 공감하며 그들을 돕고 축복하면 그들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으리라’(20)고 하십니다.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다’는 표현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악한 자들을 이기는 방법은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을 이기는 방법(21)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의 중심내용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밥 먹듯이 ‘새끼야!’라고 하는 회장을 축복한다는 것이, 국민의 녹을 먹고 살지만 ‘미친 사람’이라고 욕을 해대는 국회의원을 축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축복한다는 것’은 그냥 덮어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결국, 그들의 잘잘못을 드러내서 다시는 그런 짓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도 축복(복을 빈다는 의미)하는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진정성이 있든 없든 사과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가 온당하지 못했음을 시인하게 하는 것은 본문 20절의 말씀대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는 말씀의 실현입니다.

 

■ 성령의 사람은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사람이 공감의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여러분, 함께 즐거워하기가 쉬울까요, 함께 울기가 쉬울까요? 함께 즐거워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나하고 다를 바 없는 사람인데 혹은 나보다 못하다 생각했는데 더 잘나가면 저도 모르게 시기심이 생깁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먼저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공감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누가 울고 있습니까? 강도를 만나 사지에 몰린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볼 줄 알아야 그들과 함께 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당하는 아픔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그들을 향해서 열리는 것이 ‘눈 뜨는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요, 그리하여 우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에 뛰어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공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공감의 능력을 갖춘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공감의 가장 성숙한 단계를 “전체 집단이나 심지어 동물의 고통을 자신의 고민으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웃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내가 타인의 입장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헤아리는 훈련을 하십시오.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 영역을 넓혀가십시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함께 즐거워하고 울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을 갖춘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공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나는 공감의 능력을 갖추었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해 화가 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19절 말씀에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사람들이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끊임없이 원수와도 공감하고자 노력하십시오. 그들과 같아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이기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합니다. 원수가 불쌍해지는 순간, 우리는 원수를 이기는 것입니다. 아직도 원수가 죽이도록 밉다면, 아직 우리는 원수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 공감하십시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그들의 삶에 공감하십시오. 들에 피는 꽃 한 송이,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그들과 공감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나무나 꽃 등 초록 생명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존재함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고, 그들의 희생과 나눔을 통해서 살아감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들은 인간 마음대로 함부로 대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그들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서로 수단으로 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감을 잃어버린 사회는 불행한 사회인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사회적 현상만 보면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내가 끊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절의 ‘원수 갚은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내게 맡기고, 성령의 사람인 너희는 끊임없이 공감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도우시겠다는 것이지요.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공감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피리를 불어도

 

마태복음 11장 16-17절에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가 등장합니다. 그 놀이의 규칙은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피 우는 흉내를 내면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춤을 추다가 웃다가’ 이런 반전의 놀이를 통해서 아이들은 장터에서 즐겁게 놉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장터 놀이는 끝나버립니다. ‘놀이’의 본질은 ‘즐거움, 기쁨’인데, 놀이가 끝나버렸으니 장터의 아이들은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습니다. 슬피 우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비유된 것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하는데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피리를 부는 것으로 비유된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실 때입니다. 사람들은 함께 춤을 춰야 하는데 먹기를 탐한다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도 예수님과도 공감하지 못합니다. 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는지, 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그 세대의 불행이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불행을 반복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공감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역을 점점 넓혀가십시오. 상대방의 동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현상만 놓고 판단하지 마시고, “왜 그랬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혹은 부모가 왜 그랬는지, 교회생활에서는 목사님이 집사님이 장로님이, 평신도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런 공감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공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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