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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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3:10-4:11(행전 28:11-31, 막 16:15-20)

  • 관리자
  • 2017-07-16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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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3:10-4:11(행전 28:11-31, 막 16:15-20)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알기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스카이다이빙을 처음 할 때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뛰어내린 후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쾌감을 느낄 뿐 아니라 자부심까지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스카이다이빙을 경험한 사람은 또 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험은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부심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또 순종하고 싶어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두렵고 떨리지만, 순종하는 기쁨을 알게 되면 선한 일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인 것은 알겠는데, 차라리 죽을지언정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싫습니다.” 한다면 이해하실 수 있으신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의 요나가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 요나서의 중심내용

 

요나서는 기원전 5세기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대는 예언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관계를 맺지 말라고 유대인들에게 명령하면서 종교적 분리주의를 강조하던 시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과 배타적 민족주의 등이 활발하게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에스라 9장에서는 이방인과 결혼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가증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방 땅을 향해서 더러운 땅, 그들의 일에 대해서는 가증한 일 등으로 표현하면서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합니다. 오랜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조국을 재건해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이들의 설교는 민족을 하나로 엮는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식민정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방인들과 결혼했기에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한 이들로 낙인찍혔고, 동족이지만 ‘개 취급’당하며 견원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거의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전적으로 속히 받아들였고, 심지어는 임금과 동물까지도 회개의 대열에 동참합니다. 다시스로 도망할 때에 함께 배를 탔던 이교도 뱃사람들 역시도 자비롭고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도 듣지 않고, 요나 역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평할 뿐 아니라 니느웨에 대한 미움이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대비를 통해서 이방인들에 대한 편협한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평행본문 중 사도행전 28장은 이방 선교에 대한 말씀인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사야서 6장 9-10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하며, ‘이방인의 빛(사 49:6)’으로 삼아주신 하나님 은혜를 왜곡하고 있다고 날 선 비판을 쏟아놓습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밝히는 책입니다. 요나는 이방선교에 대해 목숨을 걸 정도로 반목적이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이런 목적 때문에 요나서는 미완으로 끝난 것 같지만, 배타적인 선민사상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에게 전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으로 요나서는 끝을 맺지만, 요나가 이 책을 저술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습니다.

 

 ■ 앗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요나는 대충 설렁설렁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왕에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신속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하소연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이며, 니느웨는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아시리아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으로 식민지를 다스렸습니다. 앗수르인들은 전쟁 때에 초토화 전략을 썼는데,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했고,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코나 아랫입술에 쇠 갈고리를 끼워서 노예로 끌고 갔고, 필요에 따라 남겨둔 사람들은 강제로 혼인정책을 펼쳐서 동화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이런 강제혼인정책의 표본이 된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아시리아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사이였는데 지금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시라아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자비하시고 너그러운 하나님’이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기를 바랬고, 요나는 미운 니느웨가 용서받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착잡한 심정으로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 불편한 진실

 

200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 부통령이었던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지구인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지구가 어떤 상황인지,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하고 있는데, 문제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온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인 것이지요. 인간이 각성하고 돌이켜 노력하면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임이론 중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수인의 번민’이라고도 하는데 공범 A와 B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습니다. 죄수 A와 B가 모두 침묵을 하면 감옥에서 6개월을 살고, 둘 중 하나만 자백하면 자백하지 않은 A나 B는 10년을 살고, 자백한 사람은 즉시 석방됩니다. 그리고 둘 다 자백을 하면 각 5년씩 감옥에서 삽니다. 죄수 A는 B가 침묵한다면 자백하고 석방되는 것이 유리합니다. 죄수 B는 죄수 A가 침묵을 하든 자백을 하든 자백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이런 생각이 균형을 이루게 되면 죄수 AB는 모두 자백을 선택하고 5년을 복역합니다. 자백하지 않고 6개월 복역하는 선택이 있지만, 혹시라도 석방될 수 있는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을 선택하게 되면서, 피차에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사소통을 하고 의견을 교환하게 해도 여전히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개인행위자에게는 언제나 자백하는 것이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악의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죄수 AB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죄수의 딜레마>는 오늘날 환경문제나 무기경쟁이 가진 허구를 밝히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정답이 아닌 줄 알면서도 질서에 순응하고, 옳지 않은 것인 줄 알면서도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혼자 안 할 수 없어서 오답을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자유주의가 유지되는 메커니즘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신앙인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요나처럼 화를 내는 딜레마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진리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책, 그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성경은 불편한 책이고, 본질을 알면 상당히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긴가민가하다가, 그것이 현실이 되니까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화를 냅니다. 얼마나 불편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자유 사이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진리도 우리를 자유케 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신앙적인 용어로 ‘응답, 순종’이라고 합니다.

 

 ■ 요나의 마음 = 우리의 마음

 

요나의 마음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선과 악’을 나누는데 익숙합니다. ‘내로남불’이라는 신조 사자성어가 생겼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갇히게 되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타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생각에 니느웨는 멸망해야 마땅한 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니느웨 성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다(4:11)고 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니느웨 사람들은 멸망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리도 동시에 그들은 멸망해야 할 사람들이고, 오로지 자신들만 구원받을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도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부모가 충분하게 보살피지 못한 결과입니다.

 

 ■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교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흑백논리로 다가가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강요하면 안 됩니다. 정의와 심판의 논리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들을 원수처럼 여겨서도 안 됩니다. 그들이나 나나 모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타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준비를 하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아마 제가 신앙의 여정을 가는 동안 내내 고민하고 회개하며 살아가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게 요나처럼 ‘죽는 편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이나 니느웨나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일뿐입니다. 회개를 촉구할 때에 ‘응답’을 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 나니까 구원을 받고 너니까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 세상의 논리와 하나님의 말씀

 

세상의 정의와 심판의 논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맨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두렵고 떨리지만, 순종하는 기쁨을 알게 되면 선한 일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스카이다이빙을 경험하고 나면 또 뛰어내리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을 경험하면 인간적인 염려와 두려움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화내는 일이 옳으냐?”

우리가 죄인이라고 정죄한 사람들, 구원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구원계획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만, 우리 역시도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존재’요 순종하지 않고 응답하지 않으면 구원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화내지 말고, 구원받은 백성인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에 화를 내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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