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과 속(俗) -승천주일
누가복음 24:44-53
오늘은 부활절 여덟째 주일이며 승천주일입니다. 승천주일(라틴어: In Ascensione Domini)은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후 이 땅에서 40일을 머무신 후,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음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승천일을 부활 후 40일째 되는 목요일에 지내지만, 승천일을 지키는 그리스도교회에서는 목요일이 아닌 주일에 예수님의 승천의 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승천(昇天)은 ‘하늘로 올라감’이라는 뜻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상징은 한국에서 뾰족탑으로 나타났습니다.
▪성속의 울타리와 가나안 교인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 되던 시기부터 한국교회의 부흥기로 일컫는 1950년대는 수많은 사람이 도시로 이동하여 빽빽한 타향에서 배고픔과 가난의 서러움을 교회에 기대며 풀어가던 시기에 성장했습니다. 거기에 기복이 더해지고 신유와 이적이 바람몰이하면서 교회의 뾰족탑은 늘어난 교인의 숫자에 비례하여 점점 더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 뾰족탑을 정점으로 성속(聖俗)을 구분하는 높은 울타리를 세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는 교회라는 칸막이 안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고. 새로운 신분질서를 만들면서, 자신들의 울타리 밖이라고 여기는 세상과 자신들을 분리하는 삶의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단어 자체가 ‘구별되다’라는 뜻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다분히 바리새적인 형태로 발전해서 교회는 정치, 경제, 지식의 권력이 연합하여 탐욕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속(俗)은 성(聖)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울타리 밖에 해당하는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해졌습니다. 장소로서의 ‘예배당’이 ‘교회’라는 상징으로 대치되고, ‘방주’는 곧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교인은 방주에 탄 구원받은 이들이며, 교인이 아닌 이들은 홍수로 멸망할 존재로 규정하면서 구원받아야 할 시혜의 대상이므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공격적인 선교방식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살만한 여유가 생기게 되자 교회를 통해서 위로받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교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교회의 신앙적인 양심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또한 교회에 실망하여 모교회(母敎會)를 떠나 저 교회 떠도는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성속의 울타리는 넘은 교회
서울북노회 제112회 정기촬요 ‘노회현황보고’에 의하면 서울북노회에 50개 교회가 있는데, 무흡입교인 289명이 감소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상당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해마다 저희 한남교회의 규모 정도의 교회가 3개씩 없어진다는 이야깁니다. 게다가 제적교인 20명 미만의 교회가 70% 이상이라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둘째치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교회의 부흥을 이뤄가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세속이라 여겨지는 세상, 즉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보듬고 위로하는 사회봉사의 기능을 회복한 교회들이었습니다.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성속을 구분한 울타리를 허문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부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의 부흥은 양적인 크기에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기능을 회복하고, 세상의 삶과 교회에서의 삶의 일치를 이뤄가는 가운데 신앙을 구체화하고, 신앙과 삶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삶이 곧 신앙이요, 신앙이 곧 삶이라는 소중한 체험을 통해서 굳건한 믿음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이원론의 문제와 나타나는 현상
한국교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은 ‘성과 속’이라는 개념을 마치 반대의 개념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이원론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로 봅니다. 그래서 영과 육, 선과 악, 성과 속, 남자와 여자, 흑과 백, 작은 것과 큰 것,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악과 사고와 불행과 질병과 심지어는 가난까지도 사탄의 역사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원죄에 대한 관점은 더욱 심각한데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도 ‘인간의 불손종’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사탄의 유혹’이라고 보기 때문에 ‘회개’가 아닌 ‘마귀를 멸하는 것’이 구원관과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34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라는 찬송도 있는데, 그렇게 찬양을 하면서도 싸워야 할 ‘마귀의 실체’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이원론은 본래 그리스도교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를 파고들어 온 헬라철학과 노스틱주의, 영지주의, 마니교 등과 같은 이방 이단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주로 조르아스터교의 영향에서 형성된 시리아 사상인데 그들은 모든 것을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봅니다. 이것이 ‘노스틱주의’에서는 빛과 어둠의 신화적 이원론을 넘어서서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즉, 정신은 선한 것이고, 물질은 악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지요. 여기서 마니교가 등장하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베뢰아, 다락방, 구원파, 인터콥, 신사도운동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런 이원론적인 주장을 성경적인 진리라고 가리키는 선교단체와 양육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사고, 불행, 질병, 가난, 이 모든 것은 거짓 믿음 때문에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번영신학이 나옵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축복과 권력의 크기는 곧 신앙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들의 논리는 ‘예수님을 믿은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축출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를 멸하러 온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래서 사회적인 약자를 끊임없이 대변하고 섬겨오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최대관심은 선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교방식은 공격적입니다. 그들에게 선교의 대상은 ‘불쌍한 영혼’이 아니라 대적해야 할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부터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신사도운동에서는 마귀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가난의 영’ 혹은 ‘음란의 영’ 같은 용어를 세밀하게 구분합니다. 가난이나 음란의 죄도 악한 영이 조장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연애하면 음란죄에 빠지기 쉬우므로 연애도 하지 말고, 순결서약을 통해서 음란의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사도운동 계열의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순결서약’을 강요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지역마다 이런 악한 지역 신이 있으므로 그들을 대적하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 땅 밟기 등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합니다. 이런 미신적인 행위들은 모두 ‘성과 속’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온 것입니다.
▪ 성(聖)과 속(俗)은 다른 방식의 하나님 나라
이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오늘 주신 말씀 44절에도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승천 모든 것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 증거 덕분에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본 이들의 마음이 열려 ‘성경을 깨닫게 되고’(45) 그 모든 일의 증인이 되는 것(48)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늘의 일인 동시에 ‘땅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표상으로 가정과 교회를 주셨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이 땅, 곧 속(俗)에 있을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과 속은 다른 방식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시는 바대로 지난주에 저희 아버님이 95세 이 땅의 소풍을 마치시고 귀천하셨습니다. 어머님이 하나님 품에 안기시고 2년 6개월여 만의 일입니다. 두 분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섭섭하지만, 기꺼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의 삶과 하늘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응급실에 입원하시기 전에도 아버님은 건강하셨지만, 고령의 육신이시라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거동하시지는 못했습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마음은 또 흐릿해지셨고, 판단능력도 이전과는 현저하게 다르셨을 것입니다. 다양한 한계의 상황에서 이제 속의 몸을 벗어버리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신다는 것은 복된 삶의 시작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섭섭하지만, 기꺼이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새삼 느낀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성과 속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음을 깊이 느꼈습니다.
▪성(聖)과 속(俗)의 일치
신앙생활과 일상의 삶, 즉 성의 삶과 속의 삶이 다르다면 우리는 뭔가 잘못된 것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성과 속의 일치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나비인지 꽃인지 모를 신앙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장자의 <제물론편>에 ‘호접지몽’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옵니다. 장자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깨어나서는 자기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호랑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 이야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속의 세계인 땅에 살지만, 하늘에 사는 것처럼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힘쓰지만, 완벽하고도 거룩한 성의 존재가 아니라 속의 존재, 즉 한계의 존재임을 고백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속의 세상에 살아가는 한 피조물이요, 존재물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 구원이요, 이런 이들이 이 땅을 떠나 귀천을 하면 창조주시고 존재이신 하나님 곁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에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습니다. 이것이 영생이요, 구원입니다.
한남교회가 부흥하려면 성속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성숙을 이루려면 역시 ‘성속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성속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일은 생소한 일이요, 낯선 일이기에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낯설고 생소한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실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처럼 낯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엠마오 도상을 함께 걷는 그 낯선 이가 예수님이심을 알았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가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속의 세상에서 성의 세상으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보는 제자들을 함께 성의 세계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축복해 주시며 속의 세계로 보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속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속은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속의 세상인 이곳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한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막을 수 없습니다. 승천주일에 성속일치의 진리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