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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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五傷)의 영성(요한복음 14:1-7)

  • 관리자
  • 2017-04-30 16: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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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五傷)의 영성
요한복음 14:1-7

 

이번 주일은 부활절 셋째주일입니다. 황금연휴가 시작되었음에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주일 성수 하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황금연휴가 주는 휴식보다 더 큰 쉼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삶에서 ‘주님의 날’ 주님 안에서 쉬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증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주신 말씀을 통해서 <오상의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五傷)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안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담긴 관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알몸으로 맨땅에 눕혀달라”였습니다. 임종 2년 전, 그의 몸에는 오상(五傷)이 나타났습니다. 오상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자국입니다. 그렇게 4개, 옆구리에 찔린 창 자국 1개. 그래서 ‘오상(五傷)’입니다.

사람들은 그 상처가 진짜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가톨릭에서는 그걸 ‘기적’으로 보니까요. 그런데 그런 식의 따짐은 의미가 없습니다. 핵심은 자국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상징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마지막 외침은 “저의 영과 혼을 아버지께 모두 바치오리다”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상은 ‘나의 영과 혼을 아버지께 바친 자국’입니다. 오늘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오상의 영성’을 간직하시길 바라면서,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영성의 오상(五傷)’을 새기고 살아가려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장은 13장을 배경으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도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을 팔려는 가룟 유다의 계획과 수제자 베드로가 배신할 것을 예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 사이에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 계명의 내용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제자’(요 13:35)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도마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죽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곧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2)고 하십니다.

 

‘근심,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매우 짧은 말씀이지만, 사람들이 근심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을 얻지 못하는 이유, 이런저런 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긍정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이뤄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많은 결점이 있어도 근심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잘 믿으셔서 ‘근심 없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신앙의 깊은 세계로 나가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사 별일 아닙니다. 상처받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깊게 만나면 그 상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고, 덕분에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처’를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오늘 읽은 본문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6) = 오직예수(only Jesus)’이라는 말씀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한(?) 말입니다. 이 구호는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로 느껴지지만, 예수를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불쾌한’ 말로 들려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니 천국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믿지 않으면 근심 걱정에 빠져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지옥이다.’ 문자적으로는 맞는데, 과연 그 짧은 구호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다 포괄할 수 있느냐의 문제,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은 과연 무엇인지,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왜 그토록 배타적이고 공격적인지, 왜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아가지 못하고 죽어서만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구호가 허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데서 기인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을 주석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길’이라는 단어의 상징은 ‘출애굽’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약속의 땅에 다다르기 위해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험한 길’입니다. 어떤 길이라고요? ‘험한 길’ 이게 일단 중요합니다. 쉬운 길, 탄탄대로가 아니라 ‘험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의 상징을 출애굽 사건에 머물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삶의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초창기 그리스도교는 ‘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이라고요? ‘험한 길’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허망한 이유는 ‘예수 천당’의 이미지에는 ‘험한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만사형통’, 살아서도 죽어서도 만사형통의 이미지만 있습니다. ‘천당 vs 지옥’이라는 상반된 단어의 조합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또 하나 ‘천당’이라는 단어의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오로지 마태복음에 ‘천국(하나님 나라)’이라는 축약된 표현이 있을 뿐이고, 모두 ‘하나님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here & now)’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 죽어서도 그 나라를 이어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천당’ 혹은 ‘천국’이라고 하면, 죽어서 가는 곳 정도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삶과 신앙이 별 상관이 없습니다. 죽기 전에 회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의 문제는 뭡니까? ‘예수만 믿으면’은 맞은 말인데,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 없습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영광만 있지, 상처는 없습니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이끈다는 의미의 길만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진리와 생명’이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가시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탄탄대로’가 아니었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결국, 진리와 생명과 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진리와 생명’은 하나로 묶이며, 진리와 생명의 총체가 ‘길’이고,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식이 만들어집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아버지께’로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진리와 생명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버지께 가려면, 예수가 걸었던 길을 가야 하고, 그 길이란 ‘진리와 생명’, 그렇다면 진리는 또 무엇이고 생명은 무엇인지 고민해야겠지요. 이럴 때 우리는 성경을 통합적으로 봐야 합니다. 문자에 얽매이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리를 왜곡할 수밖에 없고, 왜곡하는 순간부터 성경은 자유롭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외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얼마나 큰 걸림돌인지 모릅니다. 그 구호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험한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님을 따라 ‘험한 길’을 걸어가며 예수님의 상흔을 새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 ‘황금률’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그것의 종합은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 6:12).

 

우리는 이 말씀을 일컬어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적용해야 하는 황금과 같은 법칙’이며, ‘예수님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과 함께 산상수훈의 가장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강령’이라면, 황금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강령’인 것입니다. 둘이 한 짝입니다. 수평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일, 서로 인간답게 대접하는 일은 언제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입니다. 여기서 진리와 생명은 별개가 아님을 알 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길을 따라 사는 삶이며,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왜? ‘험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상(五傷)의 영성은 어려운 것일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건 예수님이나, 성 프란치스코 같은 엄청난 분들만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어떻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오상’을 따라갈 수 있겠어?” 그렇게 푸념하고 낙담합니다.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로 잘 알려진 백성호라는 분은 ‘오상(五傷)’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고집을 한 번 꺾고, 상대방 의견에 한 번 귀 기울일 때 못이 한 번 박힙니다. 귀찮은 걸 이겨내고 가족을 위해 재활용 분리수거를 들고 나갈 때, 또 한 번 못이 박힙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자녀의 말에 귀를 더 기울일 때 또 한 번 못이 박힙니다. 이렇게 오상을 새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 가장 소소한 일들 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손, 우리의 발에도 날마다 ‘오상의 자국’의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십자가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에 있습니다. 이것을 회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생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매일매일 천국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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