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자는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24:13-35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 24:13-35으로 ‘낯선 자는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엠마오 도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너무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 속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살아생전 마지막 유언보다도 더 간절하게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들어있는 본문입니다.
▪낯선 자, 제3의 인물
다니엘서 3장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진 사건이 나옵니다. 그 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들을 붙들어 풀무불에 넣던 사람들이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묻습니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사람은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그는 불 가운데로 다니는 ‘네 사람’을 봅니다. 그 낯선 한 사람의 모습은 ‘신들의 아들(단 3:25)’과도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 걸었던 제3의 인물, 대체 이 존재는 누구입니까?
‘제3의 인물’이라는 개념은 모더니즘 시인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이 1922년 제1차 세계대전을 목격한 후에 쓴 434줄의 시 ‘황무지’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 개념입니다. 엘리엇은 ‘제3의 인물’의 모티브를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24장에서 얻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해 가는데 ‘낯선 자, 제3의 인물’이 등장해 그들과 말을 나눕니다. <황무지>라는 시의 359-365행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시적인 해석이 아니라 내용중심의 해석입니다.
당신 옆에서 항상 동행하는 그 세 번째 사람은 누구요?
내가 세어보면 당신과 나뿐인데, 눈을 들어 하얀 길을 올려다보면, 거기에는 당신 옆에 또 다른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갈색 겉옷을 걸치고 두건을 쓴 존재가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 다른 편에는 누가 있는데,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낯선 자, 제3자에 관한 이야기는 엘리엇이나 우리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그리고 싶어하던 중요한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낡은 중세 세대를 극복하는 모티브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16세기 이탈리아의 화단을 주름 잡았던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있습니다. 그는 정서불안과 우울증과 폭음,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잦은 싸움과 살인, 투옥과 탈출, 도망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로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럼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16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로 남습니다. 그는 1601년 경에 <엠마오의 저녁식사>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1601년은 로마의 가톨릭 개혁 운동이 정점에 치달았을 무렵이었습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1563년 로마가톨릭교회는 트렌트 공회에서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등장에 맞서는 방법의 일환으로 성서 내용을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번역으로, 가톨릭은 성화로 성서의 내용을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 화가는 사회 상류층들만이 감상하고 이해하는 그림들을 그려왔는데 카라바조는 대중을 위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는 당시 가톨릭 개혁운동의 영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일부 사제들은 두 제자는 위엄 없는 촌부 같고, 부활한 예수는 수염도 없는 청년이고, 손님을 접대하는 여관 주인은 불경스럽게 모자도 벗지 않고 시중을 들고, 식탁에 올라와 있는 포도와 무화과 석류는 가을 열매들인데 부활의 계절인 봄과는 맞지 않는다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좋아하던 이들은 이 과일들은 매우 정교하게 선택한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우선 검은 반점이 있는 사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로 인간의 타락을 의미하며, 투명한 물병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데 그 투명한 물병을 통해 비친 광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식탁 위의 빵은 예수의 몸, 색이 바랜 포도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합니다. 포도는 와인의 재료이므로 성만찬에 사용되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탁 위의 과일은 예수님의 삶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제자와 낯선 자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두 제자’가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이며 그들이 가는 곳이 어딘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에서는 마가복음 16장에 두 절로 간단하게 언급된 이야기에 많은 내용이 첨부됩니다. 그 중 하나가 마가복음에는 언급되지 않은 장소가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 독립을 꿈꾸는 혁명가들의 고향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두 제자가 엠마오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으며, 한 명의 이름은 글로바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 한 명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엘리엇도 <황무지>에서 ‘낯선 자’에 대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3년 전 예수라는 청년을 만났고,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며 그가 유대의 왕으로 등극해 독립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비참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글로바는 예수가 혁명가로서 로마 군인을 몰아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다른 제자는 예수의 행위에는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며 실업자에 가까운 생활을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 것이며,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가 혁명에 성공했으면 고위 관직 자리라도 하나 얻어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그야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낯선 자, 제3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낯선 자는 부할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3자가 그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무슨 토론을 그렇게 열심히 합니까?”
“당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 며칠 동안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이오?”
“저는 모릅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청년에 관한 사건인데,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카리스마있는 예언자였소.”
개역성경에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로 번역된 부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카리스마 있는 예언자’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자 낯선 자가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어리석은 분들이여,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데 참으로 오래도 걸립니다. 예수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해 성서 전체의 핵심을 쉽게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낯선 자는 자기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제야 두 제자는 낯선 자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두 제자가 음식 대접을 하고 함께 식탁을 나눌 때, 그제야 두 제자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통로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은 인식하게 된 통로는 낯선 자에게 호의를 베풀어 집으로 초대하고 음식을 나눠준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아보자마자 예수님은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영원히 예수님은 낯선 자, 제3자로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 제3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낯선 자, 제3자’를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대접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참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예수님, 익숙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 익숙한 예수님, 익숙한 하나님을 고수하는 것이 신실한 믿음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하나님은 낯선 분이셨습니다. 낯선 하나님이 익숙해질 무렵이 되자, 또 다른 낯선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은 익숙해질 만하면 낯선 분으로, 제3자로 찾아오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만났던 그 하나님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낯선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이전에 만난 익숙한 하나님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낯선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낯선 자, 그는 또 누구입니까?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면 ‘틀리다!’라고 정죄하는데 익숙합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그 다양한 생각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들의 생각이 낯설다고 해서 그들을 배척하면 안 됩니다. 낯설더라도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귀를 기울이고, 때론 그들의 권익을 위해서 힘쓰는 가운데 우리는 또한 그 낯선 이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낯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엠마오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 그들은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낯선 자를 초대하고 대접하는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 낯선 자,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초대하시어 부활하신 예수님, 생명이신 예수님을 확증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