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에 놓인 길
창 3:22-24, 4:25-26
2017년 정유년, 설날 온 가족이 모여 귀하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새해 계획하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풍성하게 이뤄지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교육부서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주해인 어린이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본래 설교본문으로 삼았던 것은 설날 예배순서지에 요약했던 설교본문인 창세기 4장 25-26절의 말씀인데, 여러 내용들이 어린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이 사건의 전초가 된다고 할 수 있는 창세기 3장 22-24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함께 4장 25-26절의 말씀을 읽어볼까요?
많은 분들이 고향에 가셔서 교회가 조금 썰렁하긴 합니다만, 명절때라도 시골교회가 북적거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주도 종달리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설날 같은 명절이면 외지에 나가 생활하시던 분들이 고향에 오셔서 예배에 참석도 하시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분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난 주에는 서울북노회 목회자 세미나를 부여일대에서 진행했는데 1960년대 초반 20만명이 넘던 공주의 인구는 2017년 현재 11만 명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충청권은 좀 나은 편이고, 전라남도의 시골마을은 아이들 울음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가물거릴 정도로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농어촌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선후배 목사님들을 통해서 듣는 농촌교회의 소식은 참으로 참담합니다. 그럼에도 유서가 깊은 어느 교회에 들렀는데, 주일예배에 몇 명이나 모이냐는 질문에 요즘은 조금 줄었다고 하면서 '1,500명'이라고 하는데 놀랍기도 하고, 11만 명 중에서 1,500명이 이 교회를 나오면 나머지 교회들은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에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대형화의 길을 가는 것이 맞는가 싶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울서신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이들이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창세기는 가능성의 존재인 인간의 운명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을 선포하십니다. 그 후에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는" 삶의 짐을 지우시고는 에덴동산 밖으로 그들을 쫓아내십니다. 에덴 동산 밖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을 낳았고, 그들의 삶은 인류 앞에 열려진 가능성이 되었습니다.
'열려진 가능성'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그 삶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전에도 이미 '열려진 가능성'을 주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 어느 한 쪽도 닫혀있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어느 한 쪽이라도 '닫혀있는 가능성'이 었다면, 사람은 그저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길로만 걸어가는 노리개같은 존재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닫혀진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열겨진 가능성'을 허락하시고, 그 선택에 따라 책임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열려진 가능성으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있을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가능성' 즉, '열려진 가능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 가인은 질투에 휩싸여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가인은 자신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누군가 자신을 죽일까 불안해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열려진 가능성'이라는 것과 연결하면 이런 것입니다. 가인에게는 아벨을 돌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은 닫아버리고 아벨을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려진 가능성'을 주신 분이시기에 가인의 그 선택을 강제적으로 막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후의 가인을 지켜주십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동일합니다. '열려진 가능성의 존재'로 창조하셨으므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막지 않으셨지만, 죄를 범한 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에덴동산 밖이라는 '열려진 가능성' 속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던 동쪽 놋땅으로가서 자식 에녹을 낳고 도시를 세웁니다. 그리고 도시의 이름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후손 중 사람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라멕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라"며 교만함의 정점에 섭니다. 하나님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 아담과 하와에게 또 한 명의 아들을 주십니다. 하와는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 하고, 셋도 성장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에노스라고 짓습니다. 창세기는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유한하다'는 뜻입니다. '유한하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에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이 임박하기 전에 죽음을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는 피조물은 인간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다른 피조물과 인간의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종교의 필요성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인 인간, 우리의 삶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그것이 우리 인간의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열린 가능성의 존재인 우리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과 에녹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셋과 에노스의 길입니다. 가인과 에녹의 길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자신의 힘과 욕망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의 끝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인간의 교만함이 정점에 다다르는 삶입니다. 그러나 셋과 에노스의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김민기 씨의 '여러갈래 길'이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여러 갈래 길 누가 말하나 / 이 길뿐이라고 / 여러갈래 길 누가 말하나 /저길 뿐이라고'
이 길이냐 저 길이냐, 그 선택하는 것은 개인에게 열려진 가능성입니다. 가인과 에녹처럼 하나님을 불신하는 삶을 살아가느냐, 셋과 에노스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느냐는 개인에게 열려진 가능서입니다. 그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선택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인과 에녹의 길은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시더라도 인간의 교만이 지배하는 세상이요, 그로인해 생명의 존엄성이 가차없이 무너지는 세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셋과 에노스의 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 "보시기에 좋았더라!", 온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길이라는 점입니다.
2017년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붉은 닭의 해라고 합니다. 닭은 어둠을 깨뜨리고 새벽을 불러옵니다. 닭은 깊이 잠든 영혼을 깨우는 상징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늘 부인했을 때 닭울음 소리를 듣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어떤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그리고 2017년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자 하십니까? 우리 앞에 놓여진 열려진 가능성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는 새해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