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속지 마라.
야고보서 1:12-18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여러분 위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어제(12월 9일)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기록될만한 의미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JTBC의 최순실 관련 보도 이후, 이 나라를 충격에 휩싸였고, 화난 국민은 주말마다 거리로 나와 촛불을 밝혔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현실이었고, 지배권력의 치부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국민의 분노는 더 타올랐습니다. 이 사이에 불의한 권력은 판세를 뒤집고 싶어 반격을 시도했지만, 결국 대한민국 헌정사상 두 번째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탄핵이 이전과 다른 이유는 그때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가운데서 여당의 무리한 횡포로 탄핵이 가결되었다면, 이번에는 대다수 국민이 탄핵을 찬성하는 가운데 가결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해 안 되는 일이 수없이 많았지만, 저는 목사면서도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부분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350명이 넘는 아이들이 침몰당한 뱃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그 시간에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올림머리를 하며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국가권력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이들을 종북이나 사회불순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진실규명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란색만 보면 거부감을 느끼는 자신들의 생각을 많은 국민에게 세뇌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올림머리를 하고 혼자 밥을 먹은 시간이 2시간 정도는 되니, 나머지 5시간만 더 밝혀지면 '세월호 7시간'의 퍼즐은 완성되겠지만, 이 5시간의 퍼즐이 완성되는 순간 국민은 더 큰 자괴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태껏 대한민국은 불법한 권력의 놀음에 속아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역사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불의한 일에 든든한 부역자가 되었던 한국교회는 이번 일을 계기로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면, 자신의 죄악상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한남교회는 2014년 이후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떤 견해가 있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최순실 같은 사람들처럼 노란색만 보면 불편해하고, 강단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져야 한다면서 그들의 아픔을 외면했다면 우리 한남교회도 회개해야 합니다. 불의한 권력의 전방위적인 노력과 활동 때문에 속아서 그리한 것이라도 거짓에 속아 그들과 한편이 되어버렸던 어리석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단순히, 저 대형보수교회 목사들이나 단체처럼 세월호 유족에게 독설의 칼을 던지지 않았다고 면죄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악한 일과 싸우지 않았으며 고난 겪는 이들과 함께하지 않은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캐논입니다.
신앙(종교)은 우리의 일상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과는 무관하게 신앙생활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정치적인 행보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로마제국의 법에 따라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정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현실과 무관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비정치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정치적인 성향이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고, 모든 것의 캐논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지 말고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어떤 시험인가?
지난달에 대학 수능시험이 끝났고 지난주에 시험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교육체계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오로지 '대학입시'만을 위한 공부를 하게 한 후에, 단 하루에 그것을 평가하고 점수로 서열화하여 학생들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이런 교육체제는 괴물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괴물들이 한 사회의 지배권력이 되면 온 나라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지요.
캄보디아에서 몇 달간 생활할 때에 인터내셔널스쿨에 다니는 처조카들을 마중하러 종종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인터내셔널스쿨의 공통점은 어느 나라에 있든지 대체로 커리큘럼이 비슷하다는 것인데, 제가 볼 때에는 내내 노는 것입니다. 각종 스포츠 활동과 클럽활동을 지원하고 수업은 토론식으로 진행됩니다. 점수로 서열을 매기지도 않으니 시험점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그냥,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잡아두지도 않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학생이 어떤 활동을 잘하고,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서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고, 졸업시험을 볼 때에는 한 달 정도 시간을 가지고 행여라도 어떤 학생의 좋은 점을 간과하지 않을까 고심합니다. 그리고 졸업할 때가 되면, 아이들은 시험점수로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소개서'를 쓰고, 왜 그 대학에서 그것을 전공하고자 하는지를 쓰면 그것으로 합격불합격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서너 군데 원서를 내면 어렵지 않게 대학에서 입학허가증이 오고,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고3 내내 새벽 7시부터 밤 11까지 학교에 붙들어두는 것도 모자라서, 사교육에 학원으로 내몰다가 시험이 끝나고 나면, 9시 넘어 학교에 오라하고 무슨 무슨 견학이다 하여 놀이공원 같은 곳이나 다니고 오전 11시만 되면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아이들은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학에 가면 공부는 지긋지긋한 것이 되지요. 공부는 시험을 위한 것을 넘어서지 못하다 보니 일류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들 인간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가만히 우리 역사를 보십시오. 사법 천재들에 의해서 참으로 우스운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잘난 머리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 = 행동하는 신앙
시험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나라 교육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두 가지 시험이 나옵니다. 하나는, 우리가 견뎌야 할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욕심에 이끌려 시험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자기의 욕심에 끌려 시험을 받으면서 하나님 핑계를 댄다는 것이지요.
야고보서는 '행동하는 신앙'에 대한 서신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이것이 야고보서의 주제이며, 신앙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권고입니다. 1장 21절에는 중요한 문장이 하나 있는데 '너희에게 심어진 말씀'이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심어진-심어주신'은 과거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심어졌고,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나 삶으로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무엇인지 알지만, 마음이 굳어져서 그렇게 살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은 '두 마음'(1:8)'을 품을 수밖에 없고, 두 마음의 결과는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것'이기에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런 시험은 자기의 욕심으로부터 기인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지식으로 성경 말씀을 배우려고 합니다. 교회마다 무슨 무슨 성경공부가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성경공부 모임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식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성경 공부하는 것이라면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오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역되지 않으려면, 제대로 해석되려면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삶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1장 17절 말씀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십니다. 빛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회전하는 그림자'가 의미하는 바는 아리송하거나 분명치 않은 것을 말합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동굴에 갇혀서 오로지 한 방향, 동굴의 벽면만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동굴 벽면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실재인 줄로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용기를 내어 뒤로 돌아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의 세상을 만납니다. 빛의 세계를 본 사람은 동굴 안에 갇혀서 그림자가 전부라고 믿고 사는 이들이 불쌍해서 다시 용기를 내어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빛의 세계'를 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말이라며 그를 죽여버립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와 같지 않은가 싶을 때가 잦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분명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 너무도 분명한데, 끊임없이 '회전하는 그림자'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 말입니다. 교인들도 지난 130년 동안 '회전한 그림자'에 익숙해서, 빛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빛으로 초대하는 이들을 오히려 불경스럽게 여기며 돌을 던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은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욕심에 끌려 시험을 당하는 것이라면 회개해야 할 터인데, 자기의 욕심 때문에 생긴 고난까지도 합리화하는 인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을 빙자해서 자기의 욕심을 극대화는 데에만 관심을 두다 보니 올바른 신앙생활이나 올바른 교회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교인 수를 늘리고, 종탑을 높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강남의 어느 대형교회가 수백억의 건축비용을 들여 화려한 교회를 지어놓고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그에 분개하는 어떤 분이 현수막에 'ㅇ'자를 하나 붙여서 꼬집었습니다. '하나님이 당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겉만 번지르르하여 자기의 신앙이 죽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정죄합니다. 이런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속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속지 마라!” 지혜로운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십자가도 넘쳐나고 교인들도 넘쳐나고 성탄의 기쁨도 넘쳐납니다.
그런데 그곳에 과연 예수님이 계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갖 사이비와 이단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도 모자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이런 혼탁한 속임수가 만연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이곳에 오셔서 바로 잡아주십시오, 마라나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