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까지 자랄지니라
에베소서 4:13-16
비익조를 아시는지요?
비익조는 눈과 날개가 하나 뿐이라 둘이 하나가 되어야만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항아리> 중에 나오는 ‘비익조’라는 제목의 동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태어날 적부터 날개가 한 짝밖에 없는 이 새는 사랑을 해야.... 일생 반려(반쪽)을 찾아야 비로소 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엄마 비익조는 말합니다. ”사랑을 한번 해보렴. 사랑을 해야 날 수 있단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익조 같아서 혼자서는 제대로 날 수도 없고,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늘 ‘완벽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르기를 바라지만, 누구도 완전성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 한계를 인식하는 것,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를 겸손에 이르게 하고, 겸손한 삶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삶의 다른 말입니다.
1.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순간은 넘어지는 순간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학도 문제지만,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은 큰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에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독선의 권력, 그 권력을 무조건 옹호한 세력과 종교지도자들과 적당하게 기부하고 그 이상의 이익을 챙겼던 대기업의 합작품입니다.
맘몬의 현실,완벽한 질서라고 여기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더불어 사는 가치관을 깨뜨리고 각자도생으로 몰아가고,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물질로 결정하고, 정직한 방접으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그래서 온갖 불의한 일들과 불법이 횡행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개인에게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극도의 ‘개인주의’입니다. 사회적인 동물,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가 ‘홀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책임지고 다해야 한다는 고립된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라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더불어 살지 않으면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고, 인간성을 상실한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많은 이들이 불행해집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010년 OECD 통계에 의하면 노동시간, 사교유ᅟᅮᆨ비부담, 자살률, 교통사고사망률은 거의 1위를 차지했고, 행복지수와 출산률은 꼴찌입니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으로 부패국가 9위에서 1위로 등극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민낯입니다. 과연, 새상의 빛과 소금이어야할 교회는 무엇을 한 것입니까?
2. 장성한 신앙과 어린아이 신앙
사도 바울은 성령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4:7)”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분량에 따라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로 삼아주셨는데, 이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가 주목해야할 말씀은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될 때’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성령께서 다양한 직분을 주셨는데, 직분마다 의미도 있지만, 독립적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익조 같다는 것이지요. 성령께서 주신 직분은 ‘더불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남교회에도 다양한 직분이 있습니다.
평신도로부터 집사, 권사, 장로, 목사 등의 직제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군림하는 직분이 아니라 섬기는 직분이요, 목사인 저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장성한 신앙인으로 서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목사 혼자서 교회를 이뤄갈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하나가 되어 자신의 달란트를 헌신하고, 그것이 모여 ‘한남교회’라는 독특한 향기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꽃밭에 다양한 색깔의 꽃이 다양한 향기를 품고 어우러져 있듯이 한남교회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향기를 품고 ‘하나님의 교회’를 이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 빠지면, 오로지 자기의 색깔과 자신의 향기만 옳다고 합니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기 의에 바지게 되면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14절 말씀에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속임수와 유혹과 온갖 풍조에 밀려 살면서도 어린아이는 자기가 ‘완벽’한 줄로 압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장성한 신앙을 가진 분들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서심으로 온전한 신앙,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3. 어떻게 자라날 수가 있는가?
15절 말씀에 의하면 오직 사랑과 참된 생활을 함으로 가능합니다.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서 소유하려고 합니다. 삐뚤어진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무엇입니까? 이웃사랑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며 친구가 되어 주시는 이들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즉,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이 나라가 왜 이렇게 힘들어졌습니까?
사회적인 약자를 무시할 뿐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사회적인 약자로 내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진 것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것을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맘몬의 질서를 거스르는 ‘작은 것, 낮은 것, 느린 것, 못생긴 것, 단순한 것’의 회복을 통해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것이 참된 생활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비결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더불어 - ‘각 지체의 분량대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면서 기독교 안에 들어온 잘못된 생각 중 하나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물론,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보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엔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지금도 유행하는지 모르겠으나 <할 수 있다 하신 이>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지혜로운 자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구분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이 말씀조차도 오역하게 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도 할 수 있다.’고 최면을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궤략입니다.
여러분, 교회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간혹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대체로는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교회를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의 달란트대로, 각 지체의 분량대로 해야 합니다. 나는 이만큼 할 수 있으니 이만큼 했고, 저 분은 저만큼 할 수 있으니 저만큼 했다고 서로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의 신앙에 대해 존중해 줄지언정, 누군 나보다 잘하는데 하는 열등감에 빠질 필요도 없고, 누군 나보다 못한다고 우월감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자발적인 헌신과 감사, 우리 한남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 두 가지를 잘하면 우리의 신앙은 정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과 더불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면,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그 일을 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해 주시고, 복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자기의 해야할 바를 하지 않고,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면서 달라고만 떼쓰는 신앙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이 말씀이 여러분 삶에서 이뤄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