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은 누구신가?
행전 2:37-42
오늘은 ‘하나님은 누구 신가?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이어 ‘성령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모든 주제가 한 번에 다루기에는 벅찬 주제이기도 하고, 평생 한 주제만 다룬다고 해도 다 알 수 없는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 이어지는 제목을 통해서 이미 아신 분도 있으시겠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씩 다루고 있으며, 오늘은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니 낙엽도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고, 열매도 익어가기 시작합니다. 한남교회 올라오는 길에도 나뭇잎이 떨어지고, 은행이 익어서 바람에 떨어집니다. 구청에서 큰길 청소하기도 어려운데 작은 언덕길까지 청소해 줄 리도 없고, 독서당로 39길에 사는 많은 분이 이곳을 지나다니지만, 누구의 소유라고 할 것도 없어서 길가에서 가장 가까운 한남교회가 깨끗하게 청소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길 위에서 아래로 불어주면 청소하기가 쉬운데, 아래서 위로 불러오면 청소하기가 영 어렵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삶은 만만치 않겠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의 삶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순풍이 돛단듯한 삶일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입고 살아가시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1. 성령은 ‘루아하(히)’, 바람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합니다. 성령은 이와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충만’이라고 하면, 뜨거운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샛바람, 하늬바람, 갈바람, 마파람, 된바람, 높새바람, 산들바람, 태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바람의 종류가 있는 것처럼 성령의 나타나는 모양도 다양합니다.
사도행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표현한 구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하는 표현에서도 바람이 등장합니다. 이어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3)’고 하는데, 불의 혀가 마침내 큰불이 되도록 돕는 것도 바람이라는 점에서 성령은 ‘바람’이요, 그 바람은 곧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시는 분, 이해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지만 느낌으로 다가오시는 분, 그래서 거부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분, 그 바람 같은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말씀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다 성령을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읽은 사도행전에 말씀에 의하며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고치면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보혜사는 ‘파라클레스토’(헬)라는 헬라어로 위로자, 돕는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삶이란, 그분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위로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돕고 위로해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령님을 좇아 살면서 인격이 변화되고, 이 변화로 인해 이웃이 위로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가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2. 성령의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많은 분이 성령의 은사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와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누군가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마태복음 산상수훈 7장 15절 이하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못된 나무일 수밖에 없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불법을 행하는 이들일 따름입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보면 저는 성령의 열매를 떠올립니다. 포도송이를 가만 들여다보면, 실한 포도송이 가운데에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심지어는 익지 않은 푸른 것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다 실하게 맺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절제의 열매를 실하게 맺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자신이 맺은 열매보다 못하다고 헐뜯거나 혹은 다른 삶의 열매보다 작다고 스스로 자학하면 안 됩니다.
유치원 다니는 꼬마가 엄마·아빠에게 배와 비행기를 타고 싶다고 조릅니다. 그래서 엄마·아빠는 큰맘 먹고 휴가 때 제주도를 가기로 합니다. 갈 때에는 배를 타고 가고 올 때는 비행기를 타고 오면 꼬마의 소원을 다 들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연안부두에서 배를 탔는데 배가 너무 크니까, 꼬마가 배 안에서 “언제 배를 타나요?”하고 묻습니다. “지금 배를 타고 있어”라고 하니,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울음을 터트립니다. 제주항에 내리면서 먼발치에서 배를 확인한 꼬마는 “와, 나 배 탔다!”하고 좋아합니다. 비행기를 탈 때에도 공항에서 바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서 탔더니만 꼬마가 “언제 비행기를 타나요?”합니다. 아무리 비행기를 탔다고 해도 믿지 않고 울어댑니다. 나중에 공항에서 내린 후, 뒤를 돌아보면서 마침내 비행기의 형체를 온전히 볼 있으니 좋아서 펄쩍 뛰면서 “와! 비행기 탔다!”하며 좋아하더랍니다. 이미 꼬마는 배를 탔을 때, 비행기를 탔을 때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배나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에 비로소 기뻐하니 뒷북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미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었으며, 맛나게 익혀가는 과정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방향키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이미 성령이라는 큰 배를 타신 분들이요, 비행기들을 타신 분들입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에서야 “와, 배 탔다!, 비행기 탔다고 하지 마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심으로 지금 여기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성령은 ‘인격자’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상당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삼위는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비둘기처럼 임하시는 성령 하나님,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성부 하나님으로 세 분이시지만 한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만일 각자 한 분씩이라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주장한다면 다신교입니다.
발이 하나도 없는 지렁이와 발이 엄청나게 많은 지네가 친구가 되었더랍니다. 지렁이가 지네에게 물었습니다. “야, 너는 발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그렇게 꼬이거나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다닐 수 있니? 그 비결 좀 알려 줄 수 있겠니?” 지네도 자기 발을 보니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논리적으로 정리하고는 알려준 후에 시범을 보여주려고 하니 발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발이 꼬이지 않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걷는 것을 이론적으로 생각하려는 생각을 온전히 버려야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우리는 지네의 발이 꼬이는 경험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어라!’하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극히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그간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조건 믿어라! 와 무조건 아멘, 할렐루야!”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인식할 수 없으니, 우리의 한계 바깥에 있으니 배척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천지창조이신 성부 하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은 모두 인격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인격자라는 의미는 우리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역사도,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도, 보헤사 성령님의 보내심도 모두 우리 ‘인간의 구원,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인격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돕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서 인격이 변하고, 이 변화를 통해 이웃을 위로하고, 이웃을 돕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인격자’라는 인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성이 있다는 말씀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라는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는 것과 유한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영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바람처럼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시오, 성령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오, 보혜사 성령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