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예수님은 누구신가?

  • 관리자
  • 2016-10-02 14:42:00
  • hit1170
  • 222.232.16.100

예수님은 누구신가?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1) 창조주이시며, 2) 부성과 모성을 지니신 분이시며, 3) 복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서는 1) 흙에서 온 존재 2) 신령한 복을 받은 존재 3)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네 단어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에는 말에 대한 인상적인 문장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소설 머리말에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라는 부분과 소설 시작지점에 문장으로 쓴 대신들의 말에 대한 문장들입니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소설 <남한산성>의 말에 대한 문장을 떠올리게 된 것은 지난주에 있었던 교단총회와 여당대표의 단식투쟁에서 나온 번지르르한 말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국민과 나라를 위하여 등등 기름진 뱀과 같았지만, 흐린 날의 산맥처럼 그들의 말에서 진실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기름진 뱀과 같은 말에 화답하며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새로운 대열을 갖추는 것은 곧 말 잔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만 기름진 뱀과 같은 말을 하고, 정작 우리의 삶에서 신앙은 흐린 날의 산맥 같아서 신앙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삶은 없고 말만 넘쳐나는 현실’이 된 이유는 성경에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는 신앙의 뼈대가 되는 기초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이어가는 까닭입니다. 주보에 다음 주 설교 본문과 제목이 나갔듯이 다음 주에는 ‘성령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여기까지 잘 이해하면, 여러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믿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신앙의 뼈대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엄밀하게 말하면, 신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첫 번째 정의입니다.

1. 예수님은 ‘부활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말씀을 통해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네 단어-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는 우리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읽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의 말씀에 나오는 ‘예수, 부활, 생명, 죽음과 삶, 영생’ 등의 단어도 우리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역시도,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임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이 누구신가?’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자라는 사실은 왜 중요합니까?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버렸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이 땅에 국한된 구원에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한자로서 가진 죽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므로 그분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죽음 이후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종교도 빈 무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빈 무덤, ‘예수 부활’ 증언이 2천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살아 역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 의해 꾸며진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분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지 마시고,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부활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삶은 생명의 삶입니다. 생명의 삶이란, 진시황처럼 불사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생명(生命)은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겠습니까?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빼앗긴 이들의 풍성한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부활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부활자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하는 단어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29절에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말합니다.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속죄양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속죄양만이 인간의 본질적인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말하는데 그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지요. 그에 따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다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요?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면 천국에 이를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보십시오.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과연, 인류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온 힘을 다하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을까요? 저마다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지상낙원이 아닙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神學, liberal theology, liberal christianity)이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 감정, 경험, 도덕적인 능력, 역사적인 낙관론, 문화창조능력을 강조했으며, 그간 중세 기독교를 지탱하고 있었던 교회의 신학, 교리, 전통을 배척했습니다. 물론, 중세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면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디만, 대부분의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진보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따랐으며, 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을 과학과 심리학으로 해명하려고 하였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야만성이 드러나면서 모순을 드러내었으며,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에밀 브룬너, 폴 틸리히,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 몰트만 등에 의해 신정통주의가 등장하면서 붕괴되었습니다. 아직도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창조과학회와 보수적인 신학을 유지하는 이들은 자유주의신학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성현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타인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가, 타인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 창시자도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죄의식이 희박하든지 아예 없습니다. 단지 도덕과 윤리만을 강조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에서 살펴보았지만, 한계 안에 살아가는 존재요, 아무리 도덕적으로 산다고 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죄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오직 예수’인 이유입니다.

 

3. 예수님은 ‘참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신가?’에서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인데 예수님은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 중에서도 ‘참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구유,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히브리서 2장 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기에 우리 인간을 진정으로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정리하면, ‘우리를 위한 진정한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그는 반드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공감적 이해’라고 합니다.

 

‘공감’,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지닌 사람으로 오시어 인생의 애환을 몸소 겪으심으로 사람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지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 어떤 비천한 삶에 처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도 공감하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귀한 은총입니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낮고 천한 사람뿐 아니라 높고 부유하고 똑똑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도 온전히 돕고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주위에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 백부장 같은 로마의 장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산헤드린 의회 위원도, 아리마대 지방의 거부 요셉, 엘리트 중의 엘리트 였던 바울도 온전히 돕고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공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빈부귀천을 떠나 한 형제자매로 어울리는 것입니다. 혹시 다른 분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어, 남보다 더 부유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아픔과 중압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때에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려고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혹시, 너무 비천한 삶이며, 실패한 삶이라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때에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려고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감히 그분에 대해서 ‘이것이다!’하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은 ‘부활자’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참인간’이셨다는 큰 줄기를 나누었습니다. 고구마의 큰 줄기를 잡아당기면, 작은 줄기에 달렸던 고구마들도 딸려나오는 것처럼, 오늘 나눈 예수님의 이야기들은 ‘큰 줄기’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인간이심을 부정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아, 자녀답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