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창세기 4:1-15 “
이 본문은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나?” 하는 질문과 함께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나?” 는 어려운 질문이 담긴 본문입니다. 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 대한 질문
가인은 농부 / 아벨은 양치기 – 두 사람은 모두 생산물의 일부를 바치면서 하나님의 가호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십니다. 이에 화난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아벨의 제사만 받은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신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피의 제사’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아주신 것이라는 정도입니다. 신학자들은 레위기 1장 2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그리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가인과 아벨이 살던 시대에 레위기같은 제사규정이 없었습니다. 혹자는 이스라엘이 유목민이었으므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셨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유목민의 하나님으로만 가둬두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서 보듯이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셋의 아들 에노스(연약한 존재(죽을 수밖에 없는)‘에 와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만일 가인이 믿음 없이 건성으로 무성의하게 제물을 드렸다면, 가인이 ‘안색이 변하며’ 그렇게 분노할 까닭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형에게 살해를 당하는 결과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이라는 물음에는 이미 인간의 가치판단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가인에 대한 질문도 그렇습니다. “가인의 제사도 받아 주셨어야 하는데 왜 하나님은?”이라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로서는 아벨과 가인이 모두 정성스레 소출을 바치고, 하나님이 공평하게 둘 모두를 취하셨다는 본문이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본문은 우리의 걸림돌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5장 9절 말씀에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저차원이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고차원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알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그러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에게는 상충하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선악과의 유혹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셨더라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로봇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 의지로 선택한 삶이 힘들 때, “왜, 하나님은?”이라고 질문하겠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인간 됨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에덴동산의 선악과의 문제보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더 큰 난제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는 인간의 잘못이라도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것조차도 없습니다.
누가 가인과 같은 처지에서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인이 특별히 나빠서 분노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라면 당연히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기뻐하고 좌절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는 아벨의 심정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여기에 이 이야기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인간에게 도전하십니다. “분해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왜, 가인이 이토록 화가 났는지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하나님의 질문은 바꾸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만일 네가 선을 행하였다면 낯을 들고 당당하게 내 앞에 서라!” 혹은 “선을 행하였다고 떳떳하게 내게 부르짖어라!” 지금, 하나님은 가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4장 15절에서 보듯이 가인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선악을 단정 짓기 전에 인간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항변 혹은 변명의 기회를 주고 계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내가 기뻐 받을 제사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느냐? 왜 그랬는지 말해봐라.”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인의 죄는 분명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자기의 마음을 토로하지 않고, 아벨과 비교하며 분함을 마음속으로 간직한 채 끝내는 동생을 살해함으로 푼 것이 죄입니다. 이 살인의 시작은 가인과 아벨의 갈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자 그에 대한 원망의 방향을 돌려 아벨을 살해하는 것으로 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끝까지, 하나님과 가인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읽어야 합니다.
3.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과의 관계를 풀지 못하면 우리는 왜곡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이웃과의 관계도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한 짝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이웃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과 가인의 대화를 보십시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그렇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은 당연히 ‘아우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어지자 ‘아우를 죽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린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웃을 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해하는 삶을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듯이, 이웃의 한 맺힌 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음, 억울한 자의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한 이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는 이런 뜻이 숨어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비로소 원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11장 이전의 창세기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말씀의 상징성을 읽지 않고서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신화가 있습니다. 그 신화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화 속에는 그 민족의 정체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11장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포함한 대다수 이야기, 창조신화, 노아 홍수, 바벨탑 이야기와 흡사한 신화들이 고대 근동 지방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게리 그린버그는 <성서가 된 신화>에서 고대 서기관들이 성서 기록에 활용했던 문서들을 연구하면서, 구약성서의 많은 이야기들이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등 유대 민족이 이방 민족으로 치부하는 주변 국가, 민족의 신화와 전설에서 유래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1장 이전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상징성을 읽지 않고서는 제대로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죄인일지라도 해명할 기회를 주시며,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에는 그것조차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인에게 죄의 값을 물어 저주하신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두려워합니다. “내 죄가 너무 무거워서 지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너에게 표를 주어 너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겠다.”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했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자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살인죄를 범한 가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인식했을 때에는 죽음을 면하는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서 가인과 같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인죄가 사람을 죽여서만 살인죄가 아니라, 형제를 향해 분노하고 미워하면 그것이 곧 살인죄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22절에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5. 그렇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교훈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국한하지 않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첫째로,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사랑은 곧 이웃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를 때에 가능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언제든지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웃은 경쟁 관계가 아니요, 비교 대상이 아니라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길 거부하고, 비교하며 경쟁할 때에는 서로 죽이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죄인임에도 구원의 길은 닫혀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다 가인과도 같은 존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사람이 소리치지 않으면 땅이라도 돌이라도 소리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여섯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네가 아우를 지키는 자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지켰어야 할 아벨은 어디 있느냐?”
“제가 그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렇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네 이웃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지켜야 할 이웃이 어디 있느냐?”
“제가 이웃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렇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