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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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

  • 관리자
  • 2016-07-31 1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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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
출 33:20, 마 18:1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사진작가 중에 에두아르 부바는 ‘뒷모습’을 주제로 사진을 담았습니다. 뒷모습을 담은 사진에 대한 해석을 담아 미셸 투르니에는 <뒷모습>이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그 모든 것이 정면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정면의 이면인 뒤쪽, 등 뒤는 어떠한가?’ 이런 질문 속에서 사진작가는 뒷모습을 주제로 사진을 담으며,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뒤쪽이 진실이다!” 선언합니다. 저자는 너그럽고 솔직한 사람들이 왔다가 돌아서서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본 것은 오로지 겉모습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씁쓸해합니다.

 

1.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우리는 구약과 신약 즉, 두 개의 전승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대체로 구약의 예언자들이 전한 하나님은 분노하고, 질투하는 신으로 묘사했습니다. 구약의 신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신’이셨으며, 그의 얼굴을 본 자는 ‘죽음’과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예언자도 하나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숙였던 얼굴을 들게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 서 있습니다.

 

2015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중에서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슬픔(Sadness), 까칠(Disgust), 소심(Fear), 기쁨(Joy), 버럭(Anger)’이라는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어떤 감정이 도드라지는가에 따라 사람의 성격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라일리의 탄생과 함께, 그녀의 머릿속 감정 제어 본부에서 제일 먼저 태어난 감정은 기쁨이(Joy)었습니다. 기쁨이는 오직 자신과 라일리 둘만의 행복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에 행복했지만, 슬픔이(Sadness)가 등장해 라일리를 울려버리는 바람에 그 행복한 순간을 33초 만에 망쳤습니다. 슬픔이의 등장과 함께 까칠, 소심, 버럭이까지 등장하면서 라일리와 기쁨이 간의 행복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슬픔이를 머릿속 감정 제어 본부에서 쫓아내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슬픔이가 떠나자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라일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결국, 주인공 라일리는 슬픔이를 구해온 뒤에야 비로소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온전한 기쁨을 누리거나 화해를 할 때 눈물을 흘리는 것, 슬픔은 기쁨의 장애가 아니라, 조력자라는 것입니다. 눈물 없이 온전한 기쁨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2. 두려움의 신과 사랑의 신 사이에서

 

신 앞에서 인간은 등을 둥글게 굽히고 절을 함으로써 왜소함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인간은 신 앞에서 왜소해 지면, 신의 분노를 피하기 쉽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종교 대부분은 신 앞에서 등을 굽힙니다. 신은 사랑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지요. 두려움의 대상일 때는 감히 신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신의 얼굴을 본 자는 죽습니다. 지속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신을 확대재생산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뒷모습’을 보여주는 분이십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뒷모습이 진실이다’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구약의 신은 ‘존재의 진실’을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존재물인 인간이 존재의 진실을 볼 수 있는가?’입니다. ‘유한의 존재가 무한의 존재를, 현실의 존재가 초월적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결국, 이 현실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형태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왜소한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신에 대한 오해를 진실로 치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 두려움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일으켜 세우고 턱을 받쳐 땅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게 하신 것입니다. 비로소 두려움의 신과 사랑의 신 사이에 인간이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두려움의 신만 있었다면, 이제 비로소 사랑의 신이 있으므로 그 사이에서 인간은 신의 얼굴을 통해서 혹은 신의 뒷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서 어느 하나만의 선택을 강요한다면 왜곡된 신앙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인식 너머에 있는 하나님, 현존하시면서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의 얼굴과 뒷모습, 얼굴을 감추는 신, 보여주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굴을 감추셨을 때에도, 얼굴을 보여주실 때에도 한 분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미는 행위’와 ‘당기는 행위’가 있습니다.

‘민다는 것’은 자기 앞으로 쫓아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당기는 행위’는 끊임없이 자기 쪽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당기는 행위’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기 쪽으로 가져와 소유하는 것이므로 ‘노예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등을 떠밀다’, 즉 ‘미는 행위’만이 해방의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는 행위는 뒷모습이요, 당기는 행위는 정면(얼굴)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신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뒷모습’ 그래서 떠밀게 하는 신이라면 신약의 신은 정면(얼굴)인데, 결국 예수님이 인간에게 노예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일까요?

 

사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는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의 신에만 도취해서 끊임없이 ‘웃는 예수님’, ‘사랑의 예수님’만을 추구했던 한국교회는 마몬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지만 그의 뒷모습도 동시에 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사진이나 그림은 어느 한 면만 표현합니다. 이면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죽음’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어느 한 면만 붙잡고 있으면 그것이 하느님의 뒷모습이든 얼굴이든 죽은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어디서 보는가?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뒷모습과 얼굴 사이에 선 존재입니다. 구약과 신약, 둘 사이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성경을 그저 옛날이야기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부정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서 모두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이의 존재’. 이것은 ‘회색분자’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중용’의 참된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중용’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이해하지만, 중용이 가진 참뜻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얻어진 진리의 정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땅과 하늘 사이의 존재입니다. ‘사이의 존재’는 어느 하나만 전부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자기가 발 딛고 사는 곳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전부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늘만 귀한 것이 아니라, 지금 땅의 삶도 귀합니다.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라는 <주의 기도>는 이런 사이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실존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한 기도문입니다.

 

얼굴을 감추는 신, 얼굴을 보여주는 신은 다른 신이 아니라 신의 뒷모습과 앞모습입니다. 이 둘을 다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8장 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작은 자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의 얼굴을 보는 것,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들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이 찬양은 교회공동체에서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얼굴이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자매를 하나님의 얼굴 보듯이 보십시오.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하나님 대하듯이 하십시오. 이렇게 서로서로 하나님 얼굴을 대하듯이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이 곧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겠습니까?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찬양을 함께하실까요?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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