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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예배

  • 관리자
  • 2016-07-24 1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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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예배
로마서 12:1-2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본질에 충실한 대답을 꼽는다면 ‘예배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간다’는 말은 곧 ‘예배드리러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배 공동체라는 본질을 상실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많은 부분 청중의 종교적 만족감이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변질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리는 것’인데 ‘보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다’는 것은 ‘쇼(show)’와 관계가 있습니다. 쇼는 ‘배우’들이 관객들을 위해 하는 것이며, 배우들이 연극을 잘하면, 관객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냅니다. 성경에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외식’으로 해석된 헬라어 휘포크리시스(hypokrisis)는 고대 그리스어 휘포크레테스(hypocrites)에서 온 말로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무대에서 배우로서 보여주는 삶과 배우의 실질적인 삶은 다릅니다. 이런 이중적인 삶의 형태는 ‘쇼’ 혹은 ‘연극’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신앙이나 삶에서는 이런 이중적인 삶의 형태, 즉 외식하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쇼가 되었다는 것은, 예배의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며,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므로 예배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곧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며, 교회의 본질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한남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1. 주일예배와 예배시간

 

‘예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주일인 일요일에 드리는 공동예배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지난 4월 첫주에 주일의 기원에 대한 것을 정리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매 주일은, 주님의 작은 부활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초대교회 초기에는 안식일과 주일을 모두 지켰는데, 유대가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독립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안식일과 할례를 금합니다. 이때부터 안식일과 주일을 모두 지키던 초대교회는 주일만 지켰습니다.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했지만, 초대교회의 주일은 허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의 날(sunday)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초대교회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하였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감동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어떤 집단도 로마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헌신을 한 적이 없으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적인 순교행위를 통해서 로마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애국심의 표상 같은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틴 황제가 일요일을 휴일로 공표하자, 주일예배가 일요일 드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일이 곧 안식일이고,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날이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쉬는 날이며, 예배하는 날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에는 당연히 ‘안식일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신앙과 출애굽신앙에 근거한 ‘쉼’을 의미하며,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 신앙에 근거한 ‘부활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다른 게 아니라 하나입니다. 은 인간의 모든 노예적인 삶의 질서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가 있으며. ‘부활의 삶은 죄와 죽음으로 얼룩진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주일예배가 세분되어있지만, 11시 예배를 ‘대예배’라고 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예배에 큰 예배와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으므로 ‘대예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11시 예배의 기원도 유목민들의 삶과 관련이 있으므로 11시 예배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전래할 당시 농경사회였음에도 11시 예배를 오랫동안 고수해왔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들이 11시에 예배를 드렸기 때문인데, 기 기원은 소를 많이 키우던 영국사람들이 가축들의 아침밥을 주고 정리하고 교회에 가기 위해 준비하고 씻으면 10시 30분경이 되고, 교회에 가서 좌정하면 11시가 됩니다. 조금은 11시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가 허망하긴 하지만,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간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약속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살라흐(Sarah)라고 해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합니다. 새벽, 정오, 오후, 일몰, 황혼 등의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작업 중에도 기도시간이 되면 일제히 멈추고 메카를 향해서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어색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그 시간은 아주 특별한 시간입니다. 이슬람이 세계 3대 종교가 된 근저에는 이런 엄격한 기도시간에 대한 개념과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11시로 정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주일 11시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전에 나와 마음을 준비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맞습니다. 형식적인 듯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별개가 아닙니다. 예배가 거룩한 시간이 되고, 산 제사가 되려면 주일 11시 드려지는 예배에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주일성수를 하고, 예배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기본이 제대로 갖춰져야 신앙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되고, 신앙의 핵심을 파악할 때 우리의 신앙은 편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폭넓은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2. 주일성수와 봉사 – 예배하는 삶이란?

 

오늘날 주일성수라는 이름으로 해방의 날이요, 축제의 날이요, 쉼의 날인 주일이 오히려 억압과 속박의 날로 자리를 잡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 교회에 열정을 가진 신자들은 주일엔 온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요구받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평일에도 교회에서 봉사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도 제법 받습니다. 이렇게 종일 시달려야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는 어떤 신자에게도 주일이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일주일 내내, 신앙인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다보니, 주일날, 교회 안에서 온종일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는 현상이 팽배하다고 합니다. 이른바, 선데이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Allday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한 구심점에 주일예배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내려놓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짐들을 재물로 받아주시고, 그분의 쉽고 가벼운 멍에를 우리에게 지워주시며,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 힘을 얻습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 확증을 하기도 하고, 회개하며 방향을 전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을 품고 세상으로 나가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예배하는 삶입니다.

 

예배하는 삶이란, 건물적인 의미에서의 예배당 안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예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3. 예전으로서의 예배

 

우리가 주일날 시간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와 하나님의 만나는 가장 종교적 의미가 깊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해방과 자유와 생명을 종교적 상징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계시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구원계획을 찬양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창조의 역사가 재현되는 축소판이요, 이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므로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창조와 종말이 계시되고, 우리는 거기서 생명의 진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예전적이어야 합니다. 자유롭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전승되어온 예전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예전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라거나 너무 형식적이어서 성령의 감동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 영성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분입니다.

 

합창단원이 합창을 때에 기분이 좋다고 해서 악보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합창단원은 자기의 감정대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악보에 충실하여 작곡자의 음악을 바르게 재현해 내는 것이 임무입니다. 예배도 이와 같습니다. 개인적인 종교적 열정도 있지만, 이것을 억제하고 2천 년 기독교 역사의 영성에 의존하는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동참하며, 이후의 역사에 동참하는 길을 확보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한다는 것은 이 신앙고백에 참여했던 지난 역사의 모든 기독교인과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신천지는 자신들의 교주인 이만희를 재림예수로 만드는 논리를 만들면서 사도신경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피조물인 인간, 존재물이 존재,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공허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단에 자기의 영혼을 팔아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전통교회가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었다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계시하며, 창조의 역사가 재현되는 예배를 드렸다면 이런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남교회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4. 예배공동체의 중요성

 

예배를 집에서 혼자 드려도 큰 문제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혼자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만인사제론’을 따르면,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기에 얼마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불어 존재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예배도 더불어서 드릴 때 바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면 성만찬에 참여할 수도 없고, 말씀을 전달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배는 어떤 영적 묵상이나 기도와는 다릅니다. 예배는 더불어서 궁극적인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의 계시를 듣고 거기에 공동으로 응답하는 축제의 시간요,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더불어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말씀을 읽고, 말씀에 대한 설명을 설교자로부터 전달받습니다. 더불어서 예배드리는 그 공간 안에는 다양한 소리와 글자와 물질과 색깔과 느낌 등이 살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영적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공간에서 ‘너와 내’가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건물적인 의미의 ‘예배당’이 필요한 것이고, 이런 일이 제대로 이뤄질 때 그곳은 거룩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에는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의복 등을 정갈하고 깨끗하게 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예배할 때에는 마음을 담은 ‘예물’을 준비하여 봉헌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예배공동체가 거룩해지고, 더불어 예배드린 이들이 거룩해집니다. 거룩해짐, 그것을 ‘성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만 ‘성화’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요약하면 ‘예배 공동체’입니다. 주일예배를 귀하게 생각하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해짐으로 더욱더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을 얼굴을 향하시고, 그들에게 입 맞추십니다. 그런 복된 삶을 살아가는 시작, 그것은 바로 예배하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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