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응답하라
열왕기상 19:19-2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자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뭔가로 꽉 차서 그분을 위한 자리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도 없는 마음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자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생각과 자신만의 소망과 자신만의 갈망, 자신만의 꿈, 이런 것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으며, 만일에 대비해서 모든 수단과 대책들도 미리 대비해 두었습니다. 나의 계획과 생각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을 위한 자리는 없으며,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화할 수 있는 마음의 골방도 없습니다.
다를 이렇게 말합니다.
“직장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아이들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요!”, “나, 지금 집을 짓는 중이에요!”, “일하고 있어요!”, 결국 “시간이 없어요!”라는 것이죠. 누가복음 14장 15절-24절에는 ‘큰 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밭을 샀는데, 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장가를 갔는데.” 한결같이 시간이 없다고 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게으르거나 태만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의 삶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늦게 오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내’ 안에는 ‘나의 계획’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공간이 더는 없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문을 두드리실 때에도, 우리는 무언가에 정신없이 열중하느라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름 혹은 그럼에도? 그래서 우리 삶에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초대와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기적 말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야 나도 살고 교회도 살고 세상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엘리야가 엘리사를 동역자로 부르다.
이스라엘 북왕조 시대, 아합왕 때에 예언자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변의 훨씬 더 편하고 안락한 신들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혈혈단신 하나님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라는 사실에 탄식하고, 너무 지쳐서 차라리 죽기를 간청합니다(왕상 19:4-5).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너에게는 이미 후계자가 있다. 나는 너의 일을 이어받을 사람을 이미 보아두었다(왕상 19:16)”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엘리사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사꾼이었습니다. 그 부모의 농토는 비옥한 평지에 있었고, 한꺼번에 여러 쌍의 겨릿소를 부려야 할 큰 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근면할 뿐 아니라 부농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여러 명의 일꾼과 함께 여러 쌍이 소들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길을 가다,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예언자임을 상징하는 겉옷을 엘리사에게 걸쳐줍니다. 이 행동은 후계자를 세우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실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도와야 하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너는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데, 바로 너를 필요로 하신다. 그분이 너에게 영을 줄 것이다. 너를 덮은 겉옷처럼 하나님이 영으로 너를 감쌀 것이다. 와서 나를 도와라!”
엘리사는 순간 내면 깊숙이 흔들렸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보다 중요하며, 열두 겨릿소와 부모의 경작지보다도 더 중요한 일임을 알아차립니다. 엘리사의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그래서 지체없이 엘리야를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하지만 그리 단순치 않은 여러 이유가 그에게 떠오릅니다. 그는 먼저 부모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와야 합니다. 어쨌든 지금껏 키워준 부모와 전반에 걸쳐 상의해야 합니다. 정리해야 할 일도 많고, 심사숙고해야 할 일들도 넘쳐납니다. 엘리사의 복잡한 마음의 움직임을 엘리야는 이해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이 말은 “다녀오너라, 너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사명을 맡기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우리 사이에 없었던 일로 될 것이다. 선택은 너의 자유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지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부르시지만 선택은 부름 받은 자의 몫으로 남겨두십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작자 미상의 ‘문 두드리시는 예수’라는 그림의 원작은 윌리암 홀맨 헌트가 1853년에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문고리가 없어서 밖에서는 오로지 두드릴 수밖에 없으며, 문 빗장과 못은 녹이 슬었고, 풀들은 키를 넘을 듯 훌쩍 자랐어요. 담쟁이넝쿨마저 문을 칭칭 휘감고 있어요. 문은 그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문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요. 예수님 앞에 꽉 닫힌 이 문은 신의 은총을 거절하는 인간들을 뜻합니다. 신앙심을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잠긴 영혼의 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구원의 빛이 담긴 등불을 들고 다시 한 번 인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열지 않으면, 그냥 두드리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동역자로 부르시며, 결단하기를 바라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밭 한가운데서’에서 ‘지체없이’ 따르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그리하여 부농의 아들 엘리사에게 허용된 이 온전한 자유의 순간에 엘리사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성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읽은 말씀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그는 부모를 만나러 집으로 가지 않았으며, 함께 일하던 일꾼들과 마지막으로 나눌 작별의 식사를 위해 장작과 고기를 구해 올 별도의 시간도 가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쟁기를 잘게 부수게 한 후에 그것으로 불을 지피고 자신의 겨릿소를 잡아 삶습니다. 그리고 일꾼들과 함께 밭 한가운데서 작별의 식사를 나눈 뒤에 바로 엘리야를 따라나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밭 한가운데서’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일터, 삶의 자리,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전환하고자 하는 이들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의 현실로 들어오셔서 찾아내십니다. 성경은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부르실 때에 ‘지체없이’ 응답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 “연로하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할 때에도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자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라”(루가 9)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명받은 이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가족과 작별인사만 하고 오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고 하십니다. 이 모두는 어쩌면 이 시대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대상식으로 우리는 왜 여전히 가난한 이들이 여전히 굶주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세상이 난민으로 넘쳐나는지, 전쟁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지……. 그것은 우리가 하고자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과 단체가 그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힘겹게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희망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내년에요!” 이것만 끝내고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여기에서 우리 삶의 ㅊ터전에서 동역자를 찾으십니다.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셔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가시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부르심의 다양한 모습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는 많은 점에서 엘리사의 소명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는,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온전히 개인적으로 그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부르심은 세상의 가장 중요한 일과 관련이 됩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아마도, 나중에, 이런저런 조건이 맞는다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다만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사가 그렇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물론 다른 태도도 존재합니다. 부르심을 비껴가는 방법입니다.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이라고요? 그것은 목사에게나 해당하는 일이 아닌가요?” 저는 그냥 보통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그런 부르심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엘리사나 사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와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아주 바쁘거든요. 지금 하나님이 맡겨주신 삶을 살아가기도 벅찬데요? 하지만 이런 논리는 핵심을 벗어납니다. 도피에 지나지 않지요.
교회 안에 속해있는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가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유함의 부르심도 있습니다. 곧 자신의 부를 하나님의 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하는 부르심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독신의 삶을 사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혼인의 삶을 사는 부르심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혼인과 가정을 하나님의 것을 위해 열어놓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다양한 부르심이 존재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분은 누구나 자신의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봉사할 자신만의 가능성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하게 감지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주저함 없이 하나님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 한남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헌신과 봉사가 필요합니다. 많은 일 가운데 예배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162석이 가득할 수 있도록 힘쓰시고, 기도하시고,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예배실 가득 모여 예배를 드리면, 서로가 서로에게 더 큰 은혜의 감격을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은혜가 넘치는 예배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우리가 큰 힘을 얻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은, 할 일 많은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기쁨을 아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늦게 오셔도 자리가 많지만, 예배 시간에 늦으면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질 수 있는 한남교회가 되기를. 물론, 제가 해야 할 몫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게 맡겨진 일에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함께, 엘리사처럼 그 길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신 여러분, 기왕에 부르심에 응답한 것, 확실하게 응답하십시다. 주저하지 마시고 한남교회의 주체로 서 주십시오. 그래서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건강한 교회로 우뚝 서서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분이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귀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