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가?
에스겔 37:1-1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마른 뼈들의 환상’라는 제목이 붙은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뼈들 사이를 에스겔에게 지나가게 하시더니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질문하십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대답하니, 하나님은 뼈들에게 이렇게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뼈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이면, 생기를 불어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대언했더니,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사방이 뼈들이 들어맞아 연결되고, 그 말씀대로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SF영화를 떠올립니다. 사망이 골짜기에 뼈들이 가득한데, 예언자가 명령하니 뼈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맞아 생명을 얻는 장면은 좋은 영화의 소재가 될 듯합니다. 아마도 어느 영화감독이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이미 응용을 했을 것입니다. 이 좋은 소재를 그냥 두었을 리 없을 테니까요.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의 큰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기원전 1400년 경이었습니다.
솔로몬 사후, 기원전 931년 경부터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단되었고, 북이스라엘은 10지파(르우벤, 시므온,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에브라임, 므낫세)로 이뤄졌지만, 208년 후인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 망한 후 혼혈정책으로 10지파는 ‘사마리아인’으로 분류되었고, 12지파 중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지지로 이뤄진 남왕국 유다는 344년 동안 유지하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왕국 유다입니다. 이스라엘은 2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1차 포로기는 기원전 605년이었고, 2차 포로기는 19년 뒤인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이때는 시드기야 11년이었는데 왕의 아들들은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이때 400년 전통을 이어오던 솔로몬 성전도 완파되었고, 기원전 586년 이후 ‘디아스포라’ 개념이 형성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바로 이 시기에 쓰인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해서 ‘골짜기의 마른 뼈’처럼 흩어져 버린 상황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이스라엘로 귀환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38년부터였습니다. 1차 귀환 583년 때 5만여 명이 돌아왔고, 2차 귀환인 457년에 2천 명 내외가, 3차 귀환이 444년에 이뤄짐으로 142년 만에 모두 귀환했습니다. 1차 귀환을 기점으로 해도 이 환상의 말씀은 48년 이후 현실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이후에도 배신의 역사를 살아옵니다. 결국,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 당했고, 디아스포라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유대인이라는 인종적인 명맥만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1,900년이 지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국가를 재건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팔레스틴의 분쟁의 역사입니다. 2천 년 가까이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미국과 세계 각국의 막대와 부와 군수물자 등을 총동원하여 팔레스틴에 살던 이들을 무력으로 내쫓고 이스라엘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곧 에스겔 골짜기 환상의 실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팔레스틴 분쟁의 비극입니다.
복잡했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동떨어진 별세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학교에 들어가 첫 학기에 장일선 교수의 <이스라엘 역사>라는 과목을 듣는데, 수업시간마다 제가 지도를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덕분에 점수 깐깐하게 주기로 유명한 교수님인데 A+를 받았으니 그것도 복이죠. 그런데 지도를 그리며 놀랐던 것이, 당연한 일인데 지금 팔레스틴의 지도와 똑같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나 지명은 현실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그 어느 곳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니 신학교 새내기로서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엔 충격이었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의 역사와 동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구체적인 신앙을 형성하는데 이스라엘 역사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오늘 에스겔서의 말씀에서는 스토리보다, 이스라엘의 역사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언’하셨다는 대목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대언’하게 하신 후에 대언한 것을 이루십니다. 다른 하나는, 이 환상의 예언은 바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최소한 44년 이후에, 혹은 1500년 후에 성취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여러분과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창세기에 천지창조를 하는 과정에서 2장 19절에 보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뭐라 부르시나 보시려고 아담에게로 데려가고, 아담이 이름을 붙여주는 대로 이름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계획은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노아 홍수’ 이야기도 살펴보면,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면 될 터인데 노아를 불러서 시시콜콜 지시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은 홀로 일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인간을 불러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불어 함께, 그것도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홀로 하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동참하게 하여 그분의 동역자로 삼아주심으로 여느 피조물들과 다르게 창조하셨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당신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바라시지만, 그들이 거부할 때에는 당신의 계획을 수정하십니다. 더 좋은 계획이 있어도 최종선택은 인간이 하도록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창조를 후회할 지경에 이르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종 선택권을 주십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창조되었고, 존귀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홀로 창조하셨지만, 창조의 시간이 시작된 이후에는 창조하신 피조물과 더불어 일을 하셨고, 그 정점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두신 것입니다. 시간 밖에서는 홀로 일하시지만, 시간 안에서는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성서에 수많은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기의 말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예언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전한다면 그것은 예언자가 아니지요. 오늘날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우리는 대언자, 주의 사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대언자가, 주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면, 그는 거짓선지자입니다.
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인간창조 이후,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시고, 그럼으로써 영광받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됨과 인간의 피조물 됨 모두를 지키신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으며, 있더라도 그 어떤 것을 선택하든 간에 하나님이 계획한 대로 이뤄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유희를 위한 막대인형 혹은 로봇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피조물로 창조하지 않으셨기에, 인간의 선택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겪는 결과에 이를지라도 그 길을 가십니다. 이것이 공의로운 하나님, 사랑이 하나님의 표상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뤄가시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십시오. 그 일을 위해 여러분은 부름 받은 분들이십니다.
2. 하나님 말씀의 성취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에스겔 예언자가 이제 막 멸망해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마른 뼈들의 환상’, 이 환상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44년, 길게 잡으면 1500년 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현재 팔레스틴의 전쟁과 분쟁의 주원인인 이스라엘로서는 이제 겨우 흩어졌던 뼈들이 들어맞은 단계 정도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의 열망대로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가죽이 붙어 큰 군대가 되는 일이 성취된다면, 이스라엘에는 복일지 몰라도 주변 국가들에게는 저주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자녀인데, 하나님은 어느 특정 자녀만 사랑해서 그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지지하는 분이시라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강합니다만, ‘인류는 하나되게(475장)’이라는 찬양처럼, 국경도 국가도 민족주의적인 개념을 떠나 인류가 서로 더불어 사는 공생의 길을 마련하지 않으면 전쟁은 종식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은 사실 우리 인간들이 알 수 없습니다. 신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늘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지만, 만일 그분의 뜻과 계획이 우리가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과연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해야 하지만, 인간의 인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존재가 신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때론 말씀의 진의가 분명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혹시라도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물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분들은 확신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절대 교만하지 않습니다. 한계성을 가진 자신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한계성 속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우리와 다를 수 있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팔레스틴의 분쟁이 어떻게 종식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인 피조물들이 인간이 만든 살상무기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며, 혹은 살상무기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인 약자들을 죽이는 일이 일상화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 그것은 이미 이뤄진 것도 있으며, 이뤄질 것도 있습니다. 이뤄진 것을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도 이뤄질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안목과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역사는 반드시 이뤄집니다. 간혹 더디게 이뤄지는 경우는 하나님이 준비가 안 돼서가 아니라, 아직 우리가 준비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역사를 이뤄갈 동역자를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그 동역자가 되샤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가시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