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얻는 비결
마태복음 25:31-46
매주 첫 주일은 모든 세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어른들은 신앙유산을 전수하는 일의 중요성을 배우며 어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이 예배를 기억하여 미래의 한남교회를 이끌어가는 좋은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교회력에 따른 말씀의 주요내용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요약해 보면, 예언서는 미가 4:1-4절 말씀으로 심판의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을 종식하시고 평화를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이고, 함께 교독한 시편 24편의 말씀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님께 복 받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씀이며, 복음서(마 25:31-46)는 의인의 삶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9:1-10의 말씀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는 제목으로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되다는 말씀이고, ‘어린 양 혼인잔치의 날’은 미가서의 ‘여호와의 평화의 날’이며, 복음서와 시편에 나오는 의인들이 초대를 받아 영원한 삶,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으로 연결지을 수 있습니다. 교회력의 말씀을 총정리하면, 누구나 심판의 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데 그날은 의인에게는 혼인잔치와도 같은 기쁜 날이며, 의인들은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아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 영생이란?
류형선 님의 <모두다 꽃이야>라는 뮤직비디오를 보시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노래에 아름다운 영상이었습니다. 여러분, 들판에 피어나는 꽃을 생각해 보세요. 봄이면 피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꽃은 죽은 것일까요? 이듬해 봄이면 다시 어김없이 피어납니다. 그런데 피어난 그 꽃은 이전의 그 꽃인가요? 이전의 그 꽃이 아니라면 전혀 다른 꽃인가요? 우리는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보면, 내년에 또 피어날 것이라는 알기에 조금 섭섭해도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들꽃을 통해서 영생의 한 단편을 봅니다.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봄이라는 아침이 오면 다시 일어나는 것이지요.
먼저 ‘영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단어 그대로 풀면,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육체적인 ‘불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육체적인 불사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설’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의하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르면,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언제 알고 믿을 수 있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풀어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표가 있다면 그 표를 언제 구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죽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순간부터 ‘영생의 삶’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서 육체의 몸을 입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모든 이들은 지금 여기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이 땅, 육신의 삶을 마치고 나면 하나님 품에 안겨 쉬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는 부활과 영생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요, 영생은 죽지 않고 삶이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과 영생을 모두 믿는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까, 영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부활의 삶과 영생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어져 있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있을 때에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는 자만이 부활의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날, 우리의 육신이 죽는 날 우리의 영혼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므로 부활의 삶, 영생의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영생의 과정이요, 구원의 과정이요, 부활의 과정입니다. 영생과 구원과 부활은 사실 같은 말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언제 받는 것입니까? 죽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삶이 구원이요, 그 구원의 복이 영원토록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개념입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삶, 영생의 삶, 부활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삶은 우리의 육신이 그 소명을 다하는 날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3. 영생을 얻는 비결
그렇다면 ‘영생을 얻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 비결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끝에서 심판자이신 예수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에는 그 누구도 어중간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른편이나 왼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오른편이 상징하는 바는 영생의 삶이 있는 하나님 나라이며, 왼편이 상징하는 바는 지옥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이들은 구원받은 이들이요, 왼편에 서 있는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입니다.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에게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오른편에 있는 이들이 한 일들을 열거합니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으며,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서 있는 자들이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 합니다. 그때에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영생하는 삶이 아니라 영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너희가 저주를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하십니다. 그러자, 왼편에 서 있는 자들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주리시고 목마르시고 나그네 되셨을 때에나 헐벗고 병드셨을 때 옥에 갇혔을 때에 다 공양했습니다.”하며 펄쩍 뛰며 항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착각의 신앙을 봅니다. 영생의 삶을 살아왔고, 살아갈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선행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벌의 삶을 살아갈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행했다고 항변합니다. 자신들이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산상수훈 6장 1-4절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그렇습니다. 영생을 얻는 첫 번째 비결은 선행을 하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하는 선행,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나팔을 불면서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십시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갚아주십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 두 번째 비결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돕는 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가 등장합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그런데 왼편에 섰던 이들도 그들을 돌봤다고 항변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의 상징성을 읽어야 합니다.
이 단어들 앞에 ‘의’를 붙여볼까요?
의에 주린 자, 의에 목마른 자, 의가 없어 나그네 된 자, 의에 헐벗은 자, 의의 궁핍으로 병든 자, 의로운 일을 하다 옥에 갇힌 자. 이렇게 읽으면 이 말씀의 의미가 더 와 닿습니까? 왼편에 앉은 자들도 물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러 갔겠지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옥에 갇힌 자들이었을까요? 옥에 갇혔으되 여전히 실세인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그들은 주린 자를 돕고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를 도울 때 자신들의 선행을 드러내기 위해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산상수훈 6장 2절에 있는 말씀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나팔을 불며 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박수를 보내고 환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연극이다. 연극을 하면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으로 끝난다. 삶은, 신앙은 연극이 아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는 헬라어로 ‘휘포크리테스’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배우’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삶은 연극이 아닙니다. 신앙과 삶을 희극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 의를 위해서 일하다 핍박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들을 도우시고 그들과 한편이 되어주십시오. 그것이 영생의 비결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비결, 세 번째가 되겠습니다.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역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지 모릅니다.
저의 사명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취임식을 하는 날 다짐한 것을 지켜가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제가 “첫째,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말씀선포를 위해서 전념할 것입니다. 사람의 비유를 맞추기 위한 설교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에 충실할 것입니다.”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이로운 일과 불의한 일을 구분하며 살아가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정신 차리고 살아가지 않으면 언제든지 신앙의 이름으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면, 우리는 왼편에 선 자들처럼 항변할지 모릅니다. 왜 우리가 영벌을 받아야 합니까? 다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 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영생의 삶을 살아가시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한남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 한남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 그것 역시도 영생을 얻는 비결이 될 수 있도록 목사로서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협력해 주십시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