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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

  • 관리자
  • 2016-06-26 12: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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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
(갈라디아서6:11-18)

 

 1. 피그말리온, 푼그툼

 

심리학 용어 중에서 ‘스티그마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티그마란, 시뻘겋게 데워진 도장을 가축에 찍어 소유자를 표시하는 ‘낙인’인데, 특정인이 과거에 좋지 않은 행적 때문에 사회적으로 낙인 찍혀 지속해서 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게 되고, 결국에는 범죄자가 되고 만다는 이론입니다. 과거에는 노예들도 가축이나 소유물로 생각했기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나다니엘 호슨이 1850년에 발표한 <주홍글씨>에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습니다. 이후로 붉은 낙인 ‘주홍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처벌을 받은 후 헤스터는 몸가짐을 조심하며 선행을 베푸는 일에 온 힘을 다하지만, 그녀를 향한 시선은 바뀌지 않습니다. 한 번 찍힌 낙인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말씀에는 ‘스티그마’와 관련된 말씀이 등장합니다. 할례가 그것인데, 구약성서에서는 생후 8일째 되는 유아에게 시술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간에 체결된 '계약의 표징'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할례는 받았지만, 율법은 지키지 않았으며, 초대교회 시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박해를 피하려면 할례를 받으라고 권유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할례라는 ‘스티그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티그마와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심리학 용어로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내용인데 피그말리온 왕이 여인상을 만들었는데 매우 아름답고 예뻐서 여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아프르디테가 여인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 피그말리온 왕은 자신의 사랑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타인이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변하려고 노력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의 흔적’은 스티그마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라틴어 ‘푼크툼(punctum)’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뾰족한 도구에 의해 상처 난 흉터를 가리키는 말로, 화살촉처럼 아주 작은 것이 어느 부위를 찔러 상처를 입히는 아픔이 푼크툼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상처,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서 ‘어떤 강력한 느낌을 받아 삶의 전환이 이뤄지는 것’ 그것이 푼크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못과 창자국은 푼크툼, 상흔이며, 이 흔적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랑을 통해 보여주신 그 길을 걷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할례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티그마가 아니라, 속 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푼크툼’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스티그마의 피그말리온, 예수님이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이 지녔던 예수님의 흔적= 십자가

 

"신앙이 자라길 원하냐?"고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그렇습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도록 어떤 노력을 하느냐?"고 하면 고개를 숙이는 분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교인이 가지고 있는 모순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이 자라길 원하지만, 힘들여 노력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신앙이 저절로 자라기를 바라거나 공짜를 기대하는 신앙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은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신앙이 자라길 원하시는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이들의 신앙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은 나날이 성장할 것이며, 그 덕분에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다메섹 도상,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바울, 그에게 예수님의 흔적은 ‘십자가’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지니고 살아가던 예수의 흔적이 ‘십자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십자가는 영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개신교회 예배당에 남아있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십자가가 십계명의 제2계명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과 배치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기독교역사에서도 아이콘과 관련하여 종교적인 분쟁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상징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잘못 이해해서 십자가 자체를 신성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교회 우편함에 어느 분이 자필로 구구절절하게 쓴 십자가에 대한 글을 넣었습니다. 내용인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도 마음 아픈 일인데, 어떻게 십자가에 피뢰침을 꼽아 또다시 십자가를 욕되게 하느냐, 회개하고 십자가에 꽂은 피뢰침을 없애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흔적을 상징적으로 볼 수 있어서 거룩한 것이지, 그 자체가 곧 예수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게 인도하는 상징이기에 거룩한 것이요,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볼 수 있어 십자가가 우리 신앙성장의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네 가지 상징성

 

신앙이 자라길 바란다면 이에 상응한 신앙이 자라는 법도 열심히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는데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표식입니다. 형틀이었지만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고, 신앙을 자라게 하는 비밀을 담고 있는 신비스러운 도구이기도 합니다. 천국에 이르게 하는 비밀지도요, 제자 됨의 표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교훈이 무엇인지 찾아보면서 신앙 성장의 자원으로 삼습니다. 십자가에는 많은 상징적인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상상해 봅니다.

 

십자가는 4개의 막대기로 구성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막대기에서 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 그 순종의 삶에는 얼마나 큰 고통이 있을 줄 알면서도 내 뜻을 접는 순종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이 자라는 원리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말씀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때로는 채찍질 같은 말씀이라도 달게 받으십시오. 그 안에 신앙성장의 열쇠가 들어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만 취사선택해서 듣고자 한다면 그 신앙은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편식하는 신앙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막대기에서 저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섬김의 삶입니다. 팔레스틴의 집에는 돌 항아리에 물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구두를 신고 다니지 않았고, 샌들이나 맨발로 다녔기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어있습니다. 주인이 밖에서 돌아오면 종들이 기다렸다가 주인의 발을 씻겨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섬김을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데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이 섬김을 받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들이 자원하여 낮은 자들, 힘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을 섬길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신 것이죠. 여러분, 섬기십시오. 어떤 부흥하는 교회에서는 주일날이면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주차관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안내를 한다고 합니다. 제직회 석상에서도 그들은 침묵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도 섬기는 삶이고자 할 때에 한남교회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시켜 주십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그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세 번째 오른쪽 팔 벌린 막대기에서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이것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용서할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나에게 조금만 서운하게 하면 줄을 긋고 살아갑니다. 더군다나 어떤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원수처럼 지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용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떤 이를 용서한다는 것, 그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주 기쁘게 받으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 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 사람은 성장합니다. 범사에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왼쪽으로 뻗친 막대에서 저는 '성만찬을 베푸시는 주님'의 그림 상상해 봅니다. 생명의 떡이요, 구원의 피로 자신을 주시며 죽어 가는 이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성만찬, 그것은 'holy communion' 즉, 거룩한 연합입니다. 왜 거룩한 연합입니까? 그간 사탄의 농간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 내면에서의 분열된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 성만찬을 통해서 분열되었던 그 모든 관계가 새롭게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성만찬의 의미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담긴 비밀풀이를 해 봅니다.

순종, 섬김, 용서, 생명의 신앙을 하나로 묶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생명을 나누며 연합할 때 십자가의 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한 쪽의 막대기가 모자라 기형이 아닌지, 토막 난 막대기로 남을 찌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사도 바울을 찔렀고, 사도 바울은 그 십자가의 푼크툼에 찔려 새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 상흔을 지니고 살았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종하며, 섬기며, 용서하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연합합니다. 교회는 예수의 흔적을 지닌 공동체요,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않고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구원이 없다는 말씀,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순종, 섬김, 용서함,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노력 없는 곳에는 십자가도 예수도 없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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