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함의 영성
로마서7:22-25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교우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살아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지난주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아프고 힘든 일들이 잘 지나갔는지요? 아니면 여전히 여러분이 발목을 잡고 있는지요? 곧 지나갈 것입니다. 이미 지나갔는데 본인이 아직 붙잡고 놓아버리지 않는 것인지, 지나가기 원하는데 지나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혹여라도 본인이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혜롭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순간, 모든 것은, 좋은 순간도 지나간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있을 때 잘하는’ 겸손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1. 가설은 진리가 아닙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이 가설에 의하면 결국에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예만 들면 우리나라에서 전국의 산야를 평정하던 강자 호랑이는 지금 찾아볼 수 없습니다만 호랑이의 밥이었던 토끼 같은 것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네 산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은 어느 일방적인 논리에 의해 진리처럼 포장될 뿐이지 진정 강하고, 약함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논리는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왔습니다.
고대 중세에는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위 단계에 이를수록 신과 가깝고, 선하고 아름답다고 인식했습니다. 사회구조도 여기에 맞춰 재편되었고,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관철하기 위해서 이 구조를 반대하는 것은 신에 반대하는 행위로 처단했으며, 스스로 신이 되었습니다. 이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있기까지 불변의 진리였으며, 그 이후에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대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자기 속에 있는 연약함을 돌아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을 때에만이 진정한 영성에 이르게 됩니다. 연약함이 다른 말은 ‘부드러움’입니다. 아가들은 연약하므로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 연약함으로 인하여 아가는 아가다워집니다. 아이들의 살과 뼈는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나 꽃의 새순도 보면 연약하고도 부드러운 새순을 냅니다. 거기에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드러움 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죠. 겨우내 추위와 싸우느라 굳어진 나뭇가지도 봄이 되면 푸른 싹을 내기 위해서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서 나뭇가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연약한 새순이 딱딱한 나뭇가지를 비집고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연약함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약한 채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연약함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연약함 그 자체에 머물러 있어서가 아니라 무한한 미래를 향해 열려있음에 있는 것입니다.
2. 연약함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면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데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늘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7장 22-23절에 보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데 육체 속에 있는 법이 죄의 법으로 자신을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살려고 해도 어느새 자신의 서 있는 자리를 보면 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탄식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렇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죄의 법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므로 사망의 그늘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거하는 것, 그것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그늘 안에 거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는 일,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자신은 사망의 음침한 그늘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많은 신앙인이 실패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을 하니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의 의지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도움을 주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도움을 받는 일도 중요합니다. 강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자의식이 강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감사가 메말라갑니다.
그림자노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집안에 있는 식구들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보살피고 거들며 헌신하는 어머니의 노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이들의 노동의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사실은 그림자노동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옷 하나만 해도 우리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식주가 수없이 많은 그림자노동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한계,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들은 이런 그림자노동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 속에서 살아감을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림자 노동'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용어로 바꿔 말하면 누군가의 '중보'로 인해 살아감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대해야겠습니까?
로마서 7장 25절 말씀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약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드린 감사가 아닙니다. 아직도 자기의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고(롬 7:25)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약함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사망의 그늘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모든 삶을 맡기고, 굴복시키려는 신앙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습관처럼 예수님의 말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을 자기의 신앙의 실천 없음을 합리화하는 말로 사용하거나, 말과 행동이 다른 신앙생활을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아주 위험한 신앙이요, 나태한 신앙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통곡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게 되면 모든 삶이 조심스러워집니다. 겸손해집니다. 다른 죄인들에 대해서 손가락질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독사의 자식들아!” 호통을 받았던 이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온갖 더러운 죄에 빠져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거룩하다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데 있었습니다.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그들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손가락질을 해대며 자신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가려는 이들까지도 못 가게 하니 예수님이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죄인임을 자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회개할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하면 모든 삶의 주인은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왜 자기처럼 살지 못하냐고 손가락질합니다. 결국, 회개할 길이 막혀버립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자각할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지고, 그것을 자각할 때 우리의 삶은 의미 있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낮고 천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이 그의 연약함을 대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입니다.
연말이 되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분들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성금을 합니다. 분에 넘치도록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가능한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을 몸소 겪었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압니다. 가난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가난이 주는 삶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짊어지심으로, 연약해지심으로 우리를 더욱더 깊이 사랑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성을 풍부하게 하고, 교만한 삶을 살아가지 않게 하며, 연약한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연약함의 영성.
그것이 간절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