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누가복음 19:1-10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시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께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매주 마지막 주는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입니다.
예언서의 말씀 이사야서 54장 1-8절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다시 거둬들일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이며, 함께 교독한 시편 130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 서신의 말씀 로마서 6장 15-23절은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삭개오 이야기와 연결해보면 공통적인 주제가 ‘구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이뤄지길 바랍니다.
1.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잃은 것’에 대한 비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10절의 말씀에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도 있고, 시도 있습니다. 추락해도 다시 날아오를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추락한다는 것 자체는 하늘을 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가 분실했을 때 우리는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이라는 의미 속에서 우리는 본래 그 잃어버린 것들의 전제는 ‘하나님의 소유’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존재로서 살아가는 이들, 그래서 구원밖에 있는 이들이 바로 ‘잃어버린 자’들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자’라고 자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잃어버림을 당했음에도 자신들은 여전히 그분의 소유라고 착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 위선자,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서슬 퍼런 독설을 퍼부으셨고, 그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당해서 스스로 죄인이라 자책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가와 “나는 너희를 찾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은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의 전제는 그 ‘잃어버린 자’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였다는 점입니다. 결국, 구원은 본질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릴 때에도 탕자에게 자율권을 주어 스스로 집을 나가게 했던 것처럼 돌아올 때에도 그냥 기다리실 뿐 스스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시지만, 당사자의 믿음이 없다면 기적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시고, 그 길을 열어 놓으셨을 뿐 들어오고 나갈 결단은 인간이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창세기 3:24)에서는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불칼을 두어 에덴동산으로 오는 길을 막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에덴동산은 다시 들어가고자 하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줬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오로지 결단하는 자에게만이 구원은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구원의 길을 걸어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는 왜 잃어버린 자가 되었는가?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가 왜 잃어버린 자가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또한 잃어버린 자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자라는 자각’, 여기에서 구원은 시작됩니다. 구원의 길에 서 있지만, 잃어버린 자라는 자각, 이 반대되는 것 같은 것이 서로 만나는 지점, 그것이 알파와 오메가의 현실이요, 종말론의 현실입니다.
삭개오는 헤롯 왕궁이 있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여리고에 살고 있었던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 일을 맡아보는 관리입니다. 그중에서도 세리장이었으니 삭개오는 우두머리입니다.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피지배국가에서 자신들이 직접 세금을 걷으면 반발이 일어날 것을 알았기에 피지배국가의 국민을 세리로 임명했습니다. 그렇게 임명하고는 세금을 거둘 권리를 인정해 주었고, 그들에게 일정한 세액을 상납하게 했습니다. 일정한 세액만 상납하면 자신들은 그들이 얼마를 징수하든지 묵인해 주었고, 그 대가로 급여를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알아서 세리들은 세금을 거둘 때 자신들의 급여까지도 포함해서 징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식민지백성 처지에서는 세리들이 로마제국을 위해서 일하니 꼴 보기도 싫습니다. 게다가 동족들에게 로마제국에 상납하는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아니 증오의 대상입니다. 세금이 많다고 항의라도 하면 로마의 법으로 제재를 당합니다. 로마제국은 로마제국대로, 자기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동족의 호주머니를 터는 세리들을 무시합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세리들이 의지할 것은 돈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세금을 갈취합니다. 원성은 더 높아지고,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더 돈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돈의 속성은 어떻습니까?
최고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2006년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돈은 사람에게 ‘자기 충만감’이라는 우쭐한 기분이 들게 한다. 돈이 있으면 “너희가 없어도 난 혼자 잘 살 수 있어”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이 있었는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그룹은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대기시키면서 화면보호기에 돈이 날아가는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한 그룹은 물고기 같은 자연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10분간 보여준 뒤 질문을 했는데, 타인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자연 이미지를 본 대학생들은 148초의 시간을 할애한 반면, 돈을 본 대학생들은 68초의 시간만 썼습니다. 그리고 풀기 어려운 문제를 주고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지 여부를 살펴보았더니 자연 이미지를 본 대학생들은 60% 정도가 도움을 청한 반면, 돈을 본 친구들은 30% 미만이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 실험 결과로 ’돈의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사람의 존재감은 작아진다. ‘라는 결과를 도출해 냈습니다.
물론 삭개오가 살던 시대와 2천 년의 간극은 있지만, 삭개오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외된 자신의 삶, 외톨이가 된 자신의 삶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그는 돈에 집착하는 자신의 방법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3. 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그런 고민을 하던 삭개오에게 그가 사는 여리고 성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선지다’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였지만(눅 9:19), 무엇보다도 그의 별명이 ‘죄인들의 친구’라는데 호감이 갔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자기를 만나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엇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이 비난할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 집에서 오늘 거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곧바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속여 빼앗은 것은 네 갑절로 갚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때, 그 순간 구원이 임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부자임에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체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좋고 즐거운 것보다 남들 보기에 사려 깊고 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지요.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살아가야 하는데, 자기 삶의 갑이 자기가 되어야 하는데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체면 차리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을 벗어버려야 구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체면치레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1:1로 마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목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혹은 다른 교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십시오.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눔입니다.
회개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삭개오에게는 구체적인 물질의 나눔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구원의 빛이 비춥니다. 돈에 집착할수록 왜소해지던 존재감이 돈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자 구원받은 존재로 탈바꿈된 것입니다. 인간이 감정은 ‘적응’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되어 희미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멎게 할 것 같았던 전율도 며칠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이 ‘적응’이라는 현상입니다. 삭개오의 변화, 그것은 구원에 대한 감격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없지만, 삭개오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그의 나눔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감격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집니다. 연애할 때에는 하루라도 안 보면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다가도 결혼하고 나면 먼 산 바라보듯 살아가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아내에게 “생각하면 얼굴 환해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사람 있수?”하고 물으니 놀랍게도 “김민수”라고 합니다. 물론, 조금 생각하다가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다행입니다. 연애 시절엔 즉문즉답이었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구원의 감격을 되새기십시오. 그러면, 그 구원의 감격 덕분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일상의 일부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구체적인 나눔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체면치레 신앙을 벗어버릴 때 구원은 우리의 삶에서 살아 숨 쉬는 감동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구원의 감격을 누리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