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에 대한 성도의자세
마가복음 12:41-44
오늘 읽은 말씀은 잘 알려진 말씀인데 주로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이 본문이 많이 사용됩니다. 결론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정성껏 바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데,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거짓 종교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바쳤다는 것을 내세워서 문자 그대로 ‘전 재산을 바칠 것’을 강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는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을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받았다고 하십니다.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부자의 헌금에 대해서 '풍족한 중에서 바쳤다'는 말씀 외에는 다른 말씀이 없는데도 부자가 헌금할 때에 정성껏 바치지 않았다거나 형식적으로 바쳤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헌금 역시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며, 사람들은 단지 양적으로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하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단순히 헌금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시한부 종말론’이 한때 기승을 부려서 ‘종말론’에 대한 기독교인의 이해가 깊지 못합니다. 성경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시종일관 담보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종말은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최후의 심판, 아마겟돈’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잘못된 질서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시기로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그래서 “아직은 끝이 아니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헌금과 관련한 말씀 뒤에 이어지는 예루살렘 성전붕괴와 재난과 환난에 대한 말씀은 오늘 읽은 말씀이 종말과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13개의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헌금은 로마황제의 초상이 없는 세겔이나 렙돈으로 헌금을 해야 했는데 두 렙돈은 그 당시 일당의 1/300 정도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헌금으로 유지되는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을 예언하십니다.
결국, 성전 종말의 예언은 성전붕괴가 목적이 아니고, 재난과 환난이 목적이 아니라 13장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성전회복이 목적이고,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시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시기,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므로 시작되었음에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이것이 종말론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종말, 하나님 나라 역시 오늘도 이어지고 있으므로 오늘을 살아갈 때에 ‘아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종말론적인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는 이야깁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추구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질서가 종말을 고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 이것이 성경의 종말론입니다. 혹시라도 말세 운운하며, 전 재산을 바쳐야 구원을 얻는다며, 헌신의 증거를 보여달라며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여러분의 영과 육 모두를 파멸시키려는 사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
첫 번째로는 많든 적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왔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잘 나서, 내가 남들보다 더 노력을 많이 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내 것이 되고 맙니다. 분명히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얻었다고 할지라도 땀 흘린 만큼 거두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내가 얻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했지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것이라는 고백 속에서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는 것이지, 내 것의 일부를 드린다는 심정으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를 했는가에 연연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이 깊어지면 자신이 이룬 모든 일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노려도 있었지만, 세상 말로 운도 따라줘야 하고,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첫걸음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땀 흘려 수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땀 흘림의 대가로 얻는 모든 것은 적든 많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감당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청지기'라는 말을 사용(눅 12:42, 16:1)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할 뿐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 첫 번째는 바로,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 헌금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은 부자가 바친 것이나 가난한 분들이 바친 헌금이나 모두 정성껏 드려졌으면 모두 '과부의 두 렙돈'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하면, 결국은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가 모여 교회의 재정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예물이 어떻게 쓰여야겠습니까? 허투루 쓰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절실하게 원하시는 곳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근래에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교회재정의 많은 부분이 교회 자체를 유지하는데 사용됩니다. 선교비나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보다 교회를 치장하고,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과부의 헌금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귀하게 바쳐진 예물일지라도 귀한 곳에 사용되지 않으면 바친 손길이나 쓰는 손길이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예물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에 사용된다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화려한 외관을 자랑했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금한 것을 착취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성전에서 장사했습니다. 먼 곳에서 성지순례를 와서 예배하는 자들의 호주머니를 강탈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성전은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 예루살렘을 가리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과부처럼 헌금하라고 강조하지만, 헌금이 잘 쓰이는지 감독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행동처럼 여기게 한 것입니다. 자신이 헌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살피지 않아 귀한 헌금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데 사용된다면, 헌금한 당사자게도 복이 되지 않습니다.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 큰 교회와 작은 교회 간의 격차가 극심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도시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농어촌교회의 희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농어촌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다녔던 이들이 자라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면서 도시교회의 대형화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농어촌교회는 농촌인구의 고령화와 일자리의 부족 때문에 늘 그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농어촌교회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도시교회나 큰 교회에서는 농어촌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지원들을 한다기보다는 시혜적인 차원에서 흉내나 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농어촌교회의 일 년 예산을 다 합쳐도 대형교회의 한 주간 헌금액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농어촌교회의 목회자들은 최저생계비도 보장을 받지 못하는가 하면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연봉 몇억에 대형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교단과 교계의 높은 자리를 독점하고 그들이 교단의 모든 정책을 좌지우지합니다. 이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소위 매가 처지에 출석하는 분들은 그런 불의한 일들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가 실현되려면 교회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모든 재정은 투명해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개교회주의와 성장주의에 빠져서 교인들이 하나님께 성별하여 드린 예물을 '개교회의 것'으로 여기는 한에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는 없습니다.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 두 번째는, ‘나의 헌신이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두는 일입니다. 이것은 교회 일에 관심을 두며 적극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3.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하고 남은 것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야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함께 헌금했던 부자들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 하루 생활비 루 렙돈으로 살아가는 과부가 곁에 있음에도 여전히 그들은 부자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드린 예물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몫을 성별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치고 남은 물질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검소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감으로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쌓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습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교회의 큰 흐름을 형성한 영성은 '기복주의'적인 영성이라는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식의 메시지는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늘 그 자리를 맴도는 이들에게 큰 매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도 여전히 그 '만사형통'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지가 조금 세련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부자'가 되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라'고 하지만 그 '풍요로운 삶'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물질적이요, 부흥회에서 말하던 '만사형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젠 거기에 더 나아가서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 주십시오(신 28:13)'하는 말씀이 이런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냥 '리더'라고 하니 세상적인 것 같은지 '영적 리더'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나 '영적 리더' 역시도 그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은 '기복신앙'에다 현대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리더십'을 결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냥 '리더'도 아니고 '영적 리더'니 보이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자기만족, 자아도취에 빠져서 자기의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과 죄를 사해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은 '죄를 사해주는 일-영적인 일, 보이지 않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쉬운 '육체적인 병 고치는 일-보이는 일'은 외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자 비난을 합니다. 그들의 죄 사함이라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빙자한 '사기'였던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꼴찌가 있어야 일등도 있고, 일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법입니다. 꼬리 없이 머리만 있는 것은 괴물입니다.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도 중요하지만, 꼬리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머리냐 꼬리냐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이뤄가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풍족한 중에 헌금했던 부자는 가난한 과부와 비교해 볼 때 '머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요, 가난한 과부는 '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의 예물을 더 크게 받아주셨습니까? 꼬리의 예물을 더 귀하게 받으신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는 머리냐 꼬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실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 세 번째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니 나누며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 그것은 물질의 문제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마 6ㅣ21, 눅 12:34)”는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제생활에서 정의가 일그러져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일그러져 있다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를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올바로 세우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온 것입니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런 고백들이 있을 때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눠야 합니다. 심정적으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봉사하고, 물질을 나누고 재능을 나눠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일들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 시작은 바로 오늘이다! 라는 말씀을 믿고, 오늘의 삶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