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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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된 것은

  • 관리자
  • 2016-04-17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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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된 것은
고린도전서 15:1-11

 

제주도에서 목회할 적의 이야기입니다.

성산일출봉과 그리 멀지 않은 종달리에 있는 작은 교회, 맨 처음에는 교인수도 40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골인데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은 목사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할 정도로 순박한 분들이셨습니다. 교회가 적다보니 자연스럽게 목사의 개인적인 시간도 많았습니다. 사택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바다가 있고, 배를 타고 10여분 가면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있고, 30여분만 차로 이동하면 한라산을 올라갈 수 있는 성판악 입구입니다.

 

저는 바다하고 친했는데, 낚시 때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낚시를 배웠는데, 나이 40이 될 때까지 그 취미를 이어갔으니 낚시광은 아니었지만 일가견은 있었지요.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간다고 지척에 바다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시간이 나면 낚시를 하곤 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묵상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는데 어느 분이 잡어가 낚였다면서 화를 내며 잡은 물고기를 패대기치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놓아주면 좋을 것을 기어이 죽여 버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목사의 취미가 하필이면 생명을 죽이는 것이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의 취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낚시를 하지 않습니다.

 

어느 봄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회 뒤에 있는 지미봉이라는 오름 근처를 산책하는데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릴 적 뒷동산에서 흔하게 보았던 양지꽃이었습니다. 저 꽃을 언제 보았나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시절보고 나이 40이 되어 처음으로 본 것입니다. 얼추잡아도 20년 이상 된 것입니다. 그 꽃을 바라보다 내 삶을 반성했습니다. 무엇에 쫓겨 사느라 저 예쁜 꽃이 매년 봄이면 피어났는데도 보지 못하고 살았을까, 장님이 따로 없었구나 싶었습니다. 또 하나는 저 들꽃은 누가 봐주지 않아도 온힘을 다해서 피어나는데, 나는 누군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봐주지 않으면 실망하면서 내 삶을 제대로 피워내질 못했구나 하는 반성이었습니다. 쪼그려 앉아 양지꽃 주변의 한 평을 바라보니 거기엔 양지꽃 말고도 수십 종의 들풀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아라, 들에 핀 꽃을 보아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날 아침 교회 텃밭에 섰는데 그동안 보이지 않던 풀꽃들이 보이고, 달팽이에 땅강아지, 지렁이가 보이고, 풀잎마다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있는데 그동안 보이지 않던 신세계였습니다. 그동안에도 이런 모습이었을 터이니 장님이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양지꽃을 만난 그날, 저는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지요. 이제 생명을 죽이는 취미에서 생명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취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다 보니 그 아름다운 생명의 몸부림,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을 저 혼자 보는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흔적들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점들을 기독교적인 언어를 함축한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가 살던 동네에서 서귀포 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삼달리라는 동네에 김영갑이라는 유명한 사진작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명한 김영갑 갤러리를 만든 분이죠. 당시 루게릭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사진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이미 제가 쓴 책을 읽고 저를 만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진에 대한 조언을 하면서 ‘남들이 찍지 않는 사진, 자신만의 주제를 갖고 사진을 담으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은 산이나 희귀한 야생화를 담기보다는 야생화매니아들이 담으려하지 않는 우리 주변에 흔하디흔해서 잡초라고 불리는 것들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남들은 별 관심도 없는 잡초, 상처입은 꽃을 사진으로 담고 글을 쓰는 목사로 점차 알려지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제주mbc 생방송에 출연을 하고, 제주극동방송, 제주cbs 등에서 들꽃이야기와 관련된 설교들을 전하게 됩니다. 한가하던 시골목회가 바빠지니 목사님 유명해졌다고 교인들은 좋아했지만 저는 교인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외부활동을 다 끊고 목회에만 전념하자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주변에서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보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사진으로 담는 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또 갈등이 왔습니다. 사진에 대한 것입니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시골에 사시는 분들에게 사진은 사치품일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교인들과 동네 분들은 바다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목사는 카메라를 들고 들판을 쏘다닌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교인들은 제가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으니 종달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좋아했습니다. 물론, 나보다는 집사람이 좋아서 그랬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말입니다. 심방을 할 때에는 성경책 대신 골갱이(호미)와 카메라를 들고, 면장갑을 챙기고, 작업복을 입고 교인들이 일하는 돌담밭을 다녔습니다. 돌담밭을 오가는 길에 참으로 많은 야생화를 보았고, 또 일하는 분들 사진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동네에는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어린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 년에 한 번씩 치료하고 수술을 하는데 대략 450-500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도움을 줄까 고민하다가 그동안 찍었던 야생화사진 전시회를 열어서 작품판매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준비를 했는데, 막상 전시회를 앞두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시무 장로님과 상의를 했습니다.

 

“장로님, 아무래도 작품이 팔리지 않아서 손해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종달교회 체면이 있지, 끝나고 나면 적자가 나도 한 아이 당 수술비의 1/10인 50만원씩은 줍시다.”

 

그렇게 전시회는 시작되었고, 소식을 들은 분들이 원근각지에서 후원을 해주시고 찾아와서 작품을 구입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한남교회 김윤애 권사님의 부군되시는 분의 직장 신우회에서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결산을 했습니다. 전시회를 위해서 들어간 모든 경비를 제하고, 아이 일인당 500만 원씩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마을회관에서 이장을 통해서 두 아이의 부모에게 전달식을 하는데 마을 분들이 제법 많이 오셨습니다. 나중에 들은 소식이지만, 그 분들은 교인 40여 명되는 작은 교회에서 도와준다고 해봤자 2-30만 원정도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저희도 놀랐지만, 동네 분들은 더 놀랐습니다.

 

이로서 동네 전도는 다 끝났습니다.

동네에는 초등학생들이 유치부 아이들까지 치면 80여명 되는데 이미 여름성경학교나 특별행사를 할 때 교회 안 나오면 왕따 수준이 되었습니다. 어버이날 동네 노인정에 막걸리 두 박스 교회 이름으로 넣어주고 오니 목사가 사람 되었다며 좋아합니다. 이후로는 교회에서 무슨 행사만 하면, 현수막에 자기 단체 이름을 넣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주도의 부조문화인데, 이름을 넣어달라는 것은 후원금을 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무슨 행사를 하면, 어촌계, 청년회, 부녀회 등이 후원을 하고 마을 청년회에서 무대장치까지 다 돕습니다. 교회행사를 하면, 이젠 교회행사가 아니라 마을행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이미 교인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주도에는 ‘괜당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현지에 살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 분들이 외지에 나가면, 교회에서 좋은 영향을 받은 분들은 거의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서울의 대형교회에서 의료선교를 온다기에 선교장소로 교회를 제공했는데 와서 잘하고 간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에도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다음 해에 와서 하는 말이 ‘작년에 자기들이 이 동네 선교하면서 교회 나가기로 작정한 분들이 몇 명인데 새 신자가 몇 명이나 늘었냐?’는 것입니다. 많이 늘지 않았다고 하니, “목사님께서 지역선교를 잘 못하셨네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당장 동네에서 얼씬도 하지 말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문제가 저희 동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주 전역에서 심각했습니다. 현지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에게 큰 상처를 준 행동이었지요. 마침, 그 대형교회 목사가 나와 나이가 같아서 장문의 서신을 통해 그들의 제주선교방향의 문제점에 대해서 쓰고, 정중하게 사과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지금도 서울의 모 대형교회에 있긴 하지만, 각종 소송에 휘말려 목사 같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을에 교회마당에서 종달리 마을노래자랑을 할 때였습니다.

사실 학교운동장도 있지만, 굳이 교회마당으로 정한 것은 교회마당에 발 한번 디뎌보지 못한 분들을 예배당 안으로 모시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교회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또 시무장로님과 상의할 일이 생겼지요. “장로님, 마을 분들이 오시는데, 그래도 잔친데 술이 빠지면 맨송맨송할 것 같고, 동네 어르신들 오시라고 해놓고 약주 한 잔 대접하지 않으면 실례일 것 같은데 어쩌죠?” 그래서 막걸리를 준비하고, 단 마을노래자랑이 열리는 날에 한해서 교회마당에서 음주가무는 허하되 예배당 안에서는 안 된다는 선에서 합의를 보고 이장에게도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동네 어르신 중에는 교회에 처음 들어와 보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교회 들어오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분들도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으니 그만큼 교회와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시골마을엔 꼭 하나씩 말썽꾸러기가 있습니다.

청년 하나가 술만 먹으면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겁니다. 평상시에는 괜찮은데 술만 먹으면 이 친구가 돌아버립니다. 동네에 처음 이사하니, 교인 중 한 분이 저에게 코치를 합니다. “목사님, 이 동네에는 술만 먹으면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단골 두 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강하게 대처를 하셔야 하고, 하나는 달래서 보내야 합니다.” 그 말에 힘입어, 마침내 이사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 친구가 보다 싶어서 그냥 패대기를 쳤습니다. 사택에 있는데 와장창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교회 유리창이며 강대상이며 다 넘어지고 깨지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보고 짖던 개의 목줄을 들어 올려 개가 숨 막혀 죽을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 힘이 얼마나 좋은지 감당이 안 됩니다. 아무튼 목사가 강하게 나오니까 이 친구도 놀랐는지 돌아갔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 친구가 이런 짓을 하기 전에는 합기도장의 원장이었으며(어쩐지 세더라), 이전의 목사님 계실 때에도 이런 일이 많았고, 심지어는 사택 지붕까지 뛰어다녀서 슬레이트가 다 깨져도 목사님이 무서워서 나와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살살 달래서 보내야 하는 친구였다고 합니다(아뿔사!).

 

이 친구는 잊힐 만 하면 일 년에 한 번 정도 교회에 와서 사고를 쳤습니다.

어느 날은 마당에서 아내와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는데, 술에 취해서는 들어와서 반성하는 의미로 자기가 다듬어 주겠다고 칼을 집어 드는 겁니다.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갑자기 돌아서 찌르면 어쩌나……. 그래서 눈을 가만 살펴보니 광기어린 눈은 아닙니다. 눈을 보면 왔다갔다 하는게 보이거든요. 그래도 몰라서 아내에게 차 한 잔 가져오라며 피신을 시켰는데, 이 양반 눈치도 없이 차를 타가지고 와서 또 거기에 앉는 것입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돌아간 후에, “넌 눈치도 없냐?”했더니만, 자기가 있어야 혹시라도 불상사사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맙긴 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이런저런 소식들이 들어가자 동네 청년회에서 그를 불러 혼을 냈다고 합니다. 너 자꾸 그러면 목사님 떠난다고. 물론, 제가 시킨 일은 아니지만 종달교회 목회에서 가장 후회로 남은 것이 그 청년입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그는 부산인가 어디로 떠났고, 제가 서울로 이사 온 뒤로 다시 종달리로 돌아왔다고는 하는데 그 이후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순하다던 친구는 술에 취해서 대로에 누워 자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는 원하지 않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교회에 잘못하면 큰일 난다. 교회는 무서운 곳이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그 소문은 금방 사그라지긴 했지만, 결국 저는 동네 전체를 대상으로 목회를 했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저를 많이 아껴주었습니다. 제주를 떠난 지 10년이 넘는데 지금도 여전히 귤이며 당근이며 감자 등을 보내주고, 서울에 오면 찾아오고, 제주에 가서 안보고 오면 서운해 하는 분들은 교인들보다도 동네분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제주도에 가도 신세질까봐 몰래 다녀옵니다.

 

오늘은 제 삶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앞으로 여러분들과 신앙적인 교류를 할 때에 더 깊은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목회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간의 만남은 결국,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필요하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남교회가 행복이 넘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불어 함께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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