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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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부활주일)

  • 관리자
  • 2016-03-27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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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부활주일)
마가복음 16:1-8

 

간세대 예배에 대한 이야기

 

본 훼퍼는 미국에서 신학교수로서 번영과 안온한 삶이 보장되었음에도 1939년 나치로 인해 신음하는 조국을 외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신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암흑의 땅이며 죽음의 땅 독일로 돌아갑니다. 귀국 전 말라기 3장 3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신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 결국 모든 행동과 실천은 분명하고 깨끗하게 될 것이다."라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의 결단으로 인해 그는 결국 암흑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그 속에서 쓴 <옥중서간>은 어떠한 명상과 신학이론보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1944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기전 마지막 새해에 어머니와 약혼녀에게 보낸 시 '선한 능력으로부터'가 후에 음악으로 만들어졌는데 독일인이 무척 사랑하는 찬송이라고 합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그 선함 힘이 우릴 감싸시니 그 어떤 일에도 희망가득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저 촛불 밝고 따스히 타올라
우리의 어둠 살아버리고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그 선함 힘이 우릴 감싸시니 그 어떤 일에도 희망가득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주님의 권능에 감싸여>

 

이 시른 쓴 감옥, 거기엔 하나님이 계셨을까요? 아니면, 본 훼퍼 홀로 있었던 것일까요? 그곳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것이며, 본 훼퍼는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하셨기에 교수대의 이슬로 살아가기 직전에도 놀라운 평화를 누리고, 어떤 일에도 희망가득 품으며, 또 하루를 새롭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갇힌 자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어 그들을 위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 감옥에 갇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평안을 누리고, 내일 죽음을 앞두고 있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하루가 또 새로운 것입니다. 어는 곳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길 바랍니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은 이성의 힘과 과학의 논리를 신봉하면서 이런 신앙의 신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신앙의 신비를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1. 부활은 죽음을 죽이신 사건

 

죽음은 생명과 대척점에 서 있는 말입니다.

생명(생명)은 ‘살아가라!’는 명령형입니다. 성경은 아주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군더더기 없이 ‘명령형’으로 단호하게 말합니다. 때로는 “~하라!”는 긍정형의 명령이 있고, “~하지 말라!”는 부정형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부정형의 명령은 긍정형의 명령보다 더 많은 긍정의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씀을 넘어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명’이라는 단어처럼, 단어 자체가 명령형인 경우에는 더 많은 상징이 담겨있습니다.

 

생명은 ‘살아가라’는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생명의 삶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죽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가 있습니다. 죽음의 종교가 있고 생명의 종교가 있습니다. 생명의 종교는 죽음의 문화와 죽음의 종교 속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신비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문화, 죽음의 종교를 죽이고 생명 부활의 삶을 꽃 피우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마침내 승리했다고 믿는 그 순간이 죽음 스스로를 자신을 찌른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곧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온 땅이 어두워지고, 지진이 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 잠자던 이들이 일어난 사건은(마태 27장) 죽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요, 죽음을 죽이고 부활하실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죽이신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생명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여기에 계시지 않음

 

안식일이 지나고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러 갔습니다. 모두 여성들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남성이 주인공인 것 같지만 사실은 여성들이 주인공입니다. 사라, 라헬, 데릴라, 미리암, 밧세바, 이세벨…….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경이 역사의 획을 긋는 사건의 주인공들은 여성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만이 생명을 잉태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일, 복 중에서 키워내는 일’은 하느님의 생명창조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가 여성임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여성들이 하는 일을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살림’이라고 합니다. 살림,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살림’은 ‘살리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 살림은 ‘살리는 일’이요, 생명의 일입니다.

 

무덤을 찾는 여인들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무덤 문에서 돌을 누가 굴려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무덤 문은 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고민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들을 우리가 안고 고민하는 것이지요. 상당히 현실적인 고민이었고, 이유 있는 고민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고민들을 진지하게 논의했더라면 힘센 장정이라도 데리고 갔어야 할 터인데 그냥 여인들은 고민하면서 갈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되겠지’, ‘될 거야’, 막연하지만 여성들에게는 이런 비합리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합리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은 평가절하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입니다. 믿음대로 살면 바보가 되고, 웃음거리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맹목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우리가 근심하는 모든 합리적인 이유들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여인들의 고민은 이미 해결되었고,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청년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무덤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을 가둬놓는 곳이요, 죽음이 지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생명이 흘러넘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한남교회는 예수님이 계시는 교회입니다. 이 곳에서 생명수를 마시고 죽음의 문화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먼저 갈리리로 가심

 

갈릴리, 그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11제자를 택한 곳이 그곳이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곳도 갈릴리 호수의 북쪽 연안이었고, 산상수훈도 이곳 언덕에서 전해졌으며, 믿음이 부족한 베드로가 풍랑 속에 빠진 것도 이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생전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안디옥’에서 최초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니 부활신앙을 믿는다는 것,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할 때 비로소 ‘부활신앙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려면 우리는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알려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거기에 ‘예배’가 더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이 묻히신 곳을 찾았고, 부활소식을 듣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 개신교가 지키는 주일입니다. 오랫동안 초대교회에서도 안식일과 주일은 함께 지켜졌습니다만, 로마의 종교정책으로 인해 안식일은 핍박을 받고, 주일(sunday)을 지키는 것은 인정되어 오늘 날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주일을 안식일의 의미를 담아 지킵니다.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드릴 수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 공적인 예배, 특히 주일예배는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이것을 몸에 배게 하십시오. 주일을 교회에서 보내면 손해 보는 것 같고, 주일날도 더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것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날은 주의 날이니, 거룩하게 지키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신앙의 기본 위에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려 부활신앙의 진수를 맛보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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