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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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높여주는 삶(종려주일)

  • 관리자
  • 2016-03-20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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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높여주는 삶(2016종려주일)
빌립보서 2:1-11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합니다. 성경에 종려나무로 번역된 나무는 정확하게는 ‘대추야자나무’라고 합니다만, 같은 종에 속하는 나무입니다. 종려나무는 ‘아름다움, 의, 승리’등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들은 며칠 뒤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따르는 제자들도 몰랐으니 군중들이야 말할 바가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에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스가랴서가 B.C 480-470년 경에 기록되었으니 500년 만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 62장 11절의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거의 700년 만에 성취된 것입니다. 5-700년 동안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으니 그 예언이 잊혀질 만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예언의 성취로 보질 못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군중들은 환호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돌아섰습니다. 그들에게 예언은 잊혀 졌고 지금 당장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바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에 대해서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서 집약되어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2장 1-1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한 삶을 살아가시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겸손의 구체적인 삶은 비움과 낮춤과 순종이었으며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겸손한 삶을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을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사건으로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부활이전에도 이미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로 멋진 삶이었습니다. 세상적인 판단의 잣대로 보면 실패한 삶이지만, 예수님의 삶은 실패한 삶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그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비록 헤롯에 의해 참수를 당했지만, 부활하지 못했어도 그의 삶의 실패한 삶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겸손한 삶’은 어쩌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코드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비우고 낮추고 순종하고, 내 생각보다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해 주고 배려하면 바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바보가 되자”고 권면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세상은 넓은 길, 넓은 문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좁은 길, 좁은 문을 추구합니다. 본래 진리의 길은 좁고 험해서 그리도 가는 이들이 적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고자 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하겠지만, 기꺼이 그것을 감당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누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가 스스로 높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가야할까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제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강조하겠지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결국 자신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할 때, 이웃을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진정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그런 사랑을 나누면 결국 그 사랑은 또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웃의 기쁨은 이웃의 기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높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자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났습니까?

책임회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도와주며 더불어 살아가라고 짝을 만들어 주셨는데 아담은 하와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의미, ‘너 때문이야!’라고 하는 것은 남을 자기보다 못나게 여긴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이런 근원적인 죄로부터 해방되는 열쇠이며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래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단 번에 그리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훈련은 남의 장점을 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단점을 보기 시작하면 장점은 보이지 않고 단점만 보입니다. 그러나 장점을 보기 시작하면 단점은 점점 작아집니다. 우리 마음에는 언제나 극단적인 두 마리의 짐승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짐승을 키울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장점이라는 동물에게 먹이를 주면 단점이라는 동물이 굶어죽고, 단점이라는 동물에게 먹이를 주면 장점이라는 동물이 죽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으로 한남공동체에 속한 모든 분들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자기를 비우십시오.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요예배 산상수훈 두 번째 시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통해서 ‘비움’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만 ‘비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비웁니까? 우리 마음창고에 들어 있는 헛된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제가 오후찬양예배 때 우상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우상이란 ‘헛된 것, 껍데기’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 마음창고에는 어떤 우상이 들어있습니까? 인간의 마음속에는 ‘탐욕’이라는 우상이 들어있습니다. ‘더 갖고 싶은 욕망’입니다. 더 갖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상대방의 것까지도 빼앗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는 ‘자족의 비결’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우리는 탐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 마음창고에 있는 것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차마 여러분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여서 거의 무기고 수준입니다. ‘교만의 칼, 열등감의 방패, 적의의 칼, 의심의 창…….’우리는 이런 것들을 우리의 마음창고에서 비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밖에서 찾으려 하니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은 ‘탐욕의 노예가 된 자기 자신을 비우는 날’입니다.

 

예화 / 네잎크로버 이야기

지천에 깔린 행복을 발견하시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비운 자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예수님의 삶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조율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자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조율의 과정입니다.

무엇의 조율이냐?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의 간격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조율이란, 신앙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입니다. 신앙은 ‘credo'입니다. credo는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도 있지만 “심장을 바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의 간격을 조율한다는 것은 “내 심장을 바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튜너라는 것입니다.

합주를 하려면 튜너에 음을 맞춰야 합니다. 기타하고 피아노가 합주를 하려면 피아노에 음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기타 치는 분이 선배라고 피아노 음을 기타에 맞추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율이 되지 않겠지요.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에서 힘겨워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튜너인데 자신이 튜너이고 싶은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어 하는 것이지요. 내 뜻을 놓아버리고 하나님께 복종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삶을 조율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자기를 비우라.
하나님께 복종하라.

이 삶을 살아가셔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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