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있는 신앙(종교개혁주일/이단경계주일)
신명기 28:1~14
오늘은 502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구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이며, 이단경계주일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던 2017년 한국교회에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과 관련된 행사들이 열었지만, 그 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면 ‘개혁’이 아니라 ‘퇴보’와 ‘변질’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그 결과는 이단들이 창궐하는 것이지요.
로버트 하쎈져(Robert Hassenger)는 ‘신앙유형의 다양성’이라는 논문에서 신앙생활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한 바 있습니다. ‘사도적(Apostolic), 도덕적(moralistic), 지성적(intellectual)’이 그것입니다. 사도적인 신앙유형은 전통적(traditional)인 신앙이라 할 수 있고, 한국의 경우에는 여기에 체험적(experiential)인 신앙의 형태가 더해질 수 있겠습니다. 이 네 가지 경계는 명확하게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로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남교회는, 여러분은 어떤 유형이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각 유형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남교회와 나는 어떤 유형의 신앙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신앙(Apostolic,traditional)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는 신앙의 유형입니다. 교리를 중시하면서 교리 안에서 설교하고 생활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보통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이 현재에 재해석되지 않고 적용된다면 딱딱한 도그마로 남을 수 있습니다. 개교회 차원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경향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전통을 중시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만큼, 보수화되어 변화를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교인 중에는 외적인 경건의 모양을 중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몇몇 교회의 전통이라 여겨지는 지식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여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경우입니다.
80년대 후반 온누리 교회를 중심으로 ‘경배와 찬양’이라는 목요찬양집회가 확산하고 있을 때 저는 전도사로 청년회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찬양집회를 할 때 기타와 드럼 키보드가 사용되었는데 신앙생활을 오래 한 교인과 담임목사님은 신성한 교회에서 어떻게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느냐며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분들의 주장은 전통적으로 성전에서는 파이프오르간이나 풍금 등의 악기를 사용했으며 타악기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통은 재해석 될 때 힘을 발휘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화석화되어 우상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 체험적 신앙(experiential)
신앙생활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체험을 중시하는 신앙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치유되는 체험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든지, 방언을 받거나, 아니면 갑자기 눈물이 터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을 맛본다든지, 신앙생활 중 일어나는 체험은 다양합니다. 이것을 ‘성령체험’이라고 합니다. 이런 신앙의 유형은 전통적인 신앙유형과 대립하기도 합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하기도 하며, 이런 체험이 없는 신앙을 머리로만 믿는 천박한 신앙이라고 낮춰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자신의 체험을 성경보다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으로 자신의 체험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렌즈삼아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체험은 다양하고, 중세 수도원의 영성과 사막의 교부들에게 이르기까지 거대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통성기도-방언-은사체험-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체험적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지성적신앙(intellectual)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수많은 질문과 의문에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추구하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누구도 감정적인 요소없이 지성만으로 신앙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지성적인 신앙이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보편적인 신앙인에게 지성은 한 측면이지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이해되어야 하고 지성적인 언어로 설명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 인간의 지적인 범주에 들어오는 분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지성적으로만 추구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적어도 성경에 대해서,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들에 대해서는 이성에 근거하여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도덕적 신앙(moralistic)
도덕적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격적인 변화를 통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어 바르고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공동체적으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세상의 문제에 응답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칭의론’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 이해되면, 신앙인의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일이나 교회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자기의 의를 쌓는 것’ 정도로 배척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과 교회공동체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라는 논리가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있습니다. 도덕적 신앙의 추구가, 그 옛날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을 교만하게 했던 것처럼 변질되면 안됩니.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며,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 한 사람 역시도 도적적,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 신앙의 통전성
여러분은, 한남교회는 어떤 유형입니까?
개인적으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우선순위를 정하라면 그 순서는 어떻게 됩니까? 문제는 통전성입니다. 이 네 측면이 얼마나 균형 잡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네 유형 중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균을 잡아가고 보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균형 잡혀 있지 않으면 언제나 사이비 이단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 유형 중에서 ‘체험과 전통’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지성적, 윤리적’측면은 약합니다. 이단 사이비가 어디를 치고 들어오겠습니까? 당연히 약한 곳을 치고 들어올 것입니다. 최근 기성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가 공략하는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신천지의 ‘비유풀이’가 지성적인 신앙에 약한 이들을 공략하는 전술이고, 하나님의 교회가 설파하는 ‘유월절의 비밀’은 도적적인 신앙이 약한 기성교회를 공략하는 전술입니다. 그들은 일부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의 맹목적인 신앙 강요와 비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것들을 들춰내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지성적으로, 도적적으로 기성교회를 월등하게 앞서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신명기 28:1~6
이 본문의 제목은 ‘순종하여 받는 복’입니다.
모든 민족 위에서 뛰어나게 되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자녀와 토지와 더불어 사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복을 누리고, 먹을 것이 차고 넘치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 삶, 이런 삶을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이런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 전제조건은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위에서 열거한 모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학원으로 내몰고,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스스로 이 모든 일을 이루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귀한 날에도 학원에서 보내면서, 주일 성수도 뒷전으로 하고, 자녀가 신앙을 잃어버린 것에는 무감각하면서 대학입시나 취업에는 민감하다 못해 목숨 거는 요즘의 세태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제도교육을 거부하고 오로지 신앙교육을 해야 한다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성경암송을 반복해서 세뇌 교육하듯이 주입하는 예도 있습니다. 성경암송을 아무리 많이 하면 뭐합니까? 외운들 그 뜻도 모르고 아이들의 인성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게 건전한 신앙교육일 수 없습니다.
■ 신명기 28:7~14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 받는 전제조건임을 밝힌 뒤,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떤 복을 누릴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쐐기를 박습니다. 이런 모든 복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하는데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씀은 같은데,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말씀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건’은 하나인데, 서로 각기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원통이 있는데 위에서 바라보면 원형지만, 수평에서 바라보면 사각형이 됩니다. 그것을 보고 원형이라 해도 맞고, 사각형이라고 해도 맞지만, 둘 중의 하나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모양인지에 따라 이익이 걸려있다고 가정하면, 각기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바를 주장할 것입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조합을 봐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앓는 홍역은 피차간에 좌로나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 사회가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고 자신의 생각만 관철하려고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결국, 신명기 말씀의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복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순종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지식과 이익을 투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라.’
■ 균형 있는 신앙
위에서 우리는 네 가지 형태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전통적인 신앙, 체험적인 신앙, 지식적인 신앙, 도덕적인 신앙, 다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통전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만 주장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는 어느 하나가 약하면, 그곳을 치고 들어옵니다.
저는 우리 한남교회가 이 네 가지 신앙을 조화롭게 견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네 가지가 잘 조화된 신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균형이 잘 잡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수많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