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이 찾아옵니다(대림절 2주)
누가복음 3:7~17
대림절이 되면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을 생각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을 때, 예수님의 때를 준비하던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연말이 되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떠들썩하게 즐기느라 피곤함에 절어있는 일상을 보낸다면, 준비하는 삶이라고 하기엔 부족합니다. 준비하는 시기인 대림절은 ‘질문하고, 생각하며, 묵상하고 다시 결심하면서 묵은 때를 벗겨 내는 시간’입니다.
한 해의 끝을 송년회다 뭐다 여기저기 떠밀려 보내다가 새해 벽두를 피곤하고 나른한 몸과 정신으로 맞이하지 마시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셔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힘차게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 삶에 새로움이 찾아옵니다.
■ 새로움을 준비하는 방법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세례받는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을 대신해서 세례를 베푸시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어떤, 의식적인 행위를 상징하기보다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영이 우리에게 찾아와 그 ‘힘’으로, 우리가 미처 순종하지 못하던 일에 순종하게 하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고, 두려워하던 일들로 움츠러들었던 우리의 삶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던 새로움이 찾아오는 계절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우리 너머로 일어날 것을 고대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이렇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들이 이뤄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은 그 새로움이 아니라 우리로 새로움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려면, 반드시 세례 요한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뭐라 말합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고….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이런 행동이 하나님의 새로움을 준비하는 방법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니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대림절을 준비하는 것은 이렇게 회개하고 나누고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누가복음 3장 뒷부분을 보면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붙잡아 가두고, 침묵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새로움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보기에 위험해 보이는 새로움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다고 오시는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도 우리에게 외칩니다.
“회개하고, 나누고, 정직하게 살라!”
그러므로 새로워지길 원합나다면 대림절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며, 묵상하고 다시 결심하면서 묵은 때를 벗겨 내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 새로움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새로움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을 하게 하셨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시고, 그를 위해 일하게 하셨으며,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불가능해 보이고 비현실적인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사야서 2장 4절에 주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 예언의 말씀이 처음 선포되었을 때에 불가능한 이야기 같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비현실적인 일이요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그 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새로움이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기 어려운 비현실적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좌절하고, 너무나도 무감각하게 사망의 질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쩔 수 없어, 내가 달라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세상이란 본래 그래’ 이런 생각은 사탄이 심어주는 낡은 생각입니다. 새로움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악순환의 삶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시는 역사가 여러분 삶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 새로움을 맞이하는 자의 마음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자 사람들은 그가 혹시 자신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우쭐해질 법도 합니다만,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겸손입니다.
잠언 18장 12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칫하면 교만에 빠지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남과 비교해서 조금 나으니까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다 된 줄로 생각된다면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지금 이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여러분이 ‘이 정도면 되었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미 넘어지신 분들이십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로마서 3장 10~12절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길로 걸어가고 싶은데, 구원받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신앙의 시작입니다. 구원받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나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이사야가 예언한 ‘그 나라에 대한 소망’과 연결되고 새로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기에 찾아오시는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매사에 ‘겸손’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 낡은 것을 벗어버리라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이 이사야 65장 17절에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이전 것’입니다. 낡은 것, 고정관념 같은 것입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생각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자라나는 세대가 교회를 등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시대는 급변했는데, 교회는 제자립니다. 그것도 저 중세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낡은 것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새로움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잘났건 못났건 이전의 나를 버리십시오.
나는 못난 사람이었으니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나는 잘나갔으니까 계속 잘나갈 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하루라도 새롭고자 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이 얼마나 멋진 좌우명입니까? 안일함과 나태함에 몸을 맡기지 말고, 매일 자신을 다잡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익숙함과 구습에 매여 새로워지기를 포기하는 순간, 성장은 멈추고 진정한 소통도 중단됩니다. 일신우일신하셔서, 찾아오는 새로움을 맞이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