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5일(주현 후 둘째 주일/여선교주일)
전위의 삶을 산 세례 요한처럼
요한복음 1:29~42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봄날처럼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셔서, 여러분의 삶의 봄날의 꽃처럼 피어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한 주간 따스한 날씨가 이어지니 봄이 오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한이 남았고, 꽃샘추위도 있으니 아직은 겨울과 봄 사이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미 남도와 동해에는 봄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동백, 매화, 납매, 풍년화, 수선화, 복수초, 변산바람꽃, 그 외에 많은 봄꽃들의 전위대로 피어났습니다. 보셨겠지만, 외벽현수막에 박노해 시인의 글을 붙였습니다.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내 등 뒤에 꽃 피어오는
너를 위하여.’
긴 겨울을 견디어 내고 봄을 피어내는 꽃들처럼, 여러분의 삶도 꽃 피어나는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전위’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앞에서 먼저 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군대에는 ‘전위대’가 있는데, 전진할 때 진로의 모든 장애를 없애고 전투를 유리하게 하는 임무를 띠고 본대의 맨 앞에 배치된 부대입니다.
성서에도 전위의 삶을 살아간 인물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사사들, 다윗, 예언자그룹 모두 신앙의 전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의 세월을 보낸 끝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눅 7.28, 마 11:11) 전위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 말입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 사가랴요, 어머니는 엘리사벳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유대사회의 근간을 지키며 사제전통을 이어가는 사제 계층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유대사회의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거친 음식을 먹고, 광야에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게다가, 변화의 자리도 성전에서 강변으로 옮겼습니다. 변화의 자리를 강변으로 옮겼다는 것은 성전 체제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기에 당시 지도층은 세례 요한의 활동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호감을 가지고 온 종교지도자들에게 조차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통 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래서 당시 지배권력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이나 권력자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지배 권력에 대해 결코 친화적이지 않았던 그는 종교지도자들에게뿐 아니라 정치권력에도 쓴 소리를 한 결과 참수를 당하고 맙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고 참수당하는 과정에서 종교지도자들의 반대가 없었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얼마나 밉보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전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고, 위험하더라도 시인의 노래대로 ‘내 등 뒤에 오는 너를 위하여’ 살아감으로 자신을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강변으로 나오실 때에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합니다. "
누가복음에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수태고지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이 기도 끝에 임신을 한 후 6개월 지났을 즈음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습니다.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태중의 아기였던 세례 요한이 기뻐 뛰놀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형이었고, 혈육적으로 사촌지간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임신했을 때부터 서로 의지하고 축하하는 사이였다면,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도 서로 친하게 교류했을 터이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친하게 알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31절에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알지 못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소명을 인식하고, 오실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전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어릴 적부터 함께 뛰놀던 예수님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에 대한 징표가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변에서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로 나아오실 때 비로소 그 징표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33절의 말씀대로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징표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징표를 보자마자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알았고, 예수님 앞에 즉각적으로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형일 뿐 아니라, 유대교에서는 지배계층에 속하는 사제 계층의 집안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의 집안은 목수의 집안으로 언제든지 강제노역에 동원될 수 있었고, 팔레스틴의 민가는 주로 흙벽돌을 사용하여 집을 지었으므로 목수의 존재가치나 위상이 별로였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하나님 어린양의 징표를 보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누가복음 3장 16절에서 밝힌 대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라고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께서 강변으로 나아오실 때, 성령이 위에 내려와서 머물렀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세례 요한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하는 사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순종하는 이들만이 결정적인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겸손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결정적인 순간, 은혜의 때를 보고 듣는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예언자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예언자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불립니다.
말라기 예언자가 기원전 450~430년에 활동했으니 400여 년 만에 ‘예언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이들이 그 앞에 나와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고, 종교지도자들도 나아왔으며, 심지어는 왕가에서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좀 교만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선을 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장 8절에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는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자기정체성입니다. 자기정체성이란,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우리를 향한 계획을 창세전부터 갖고 계십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그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란, 단지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죄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망각하고, 찾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자각했습니다. 물세례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그 선을 넘지 않는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할 신앙입니다.
35절 말씀에 보면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니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하며, 두 제자를 보냅니다. 그 두 제자 중 한 명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야고보 요한’일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소개할 때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신 순서대로 소개되었을 개연성이 많습니다.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보내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광야생활을 하는 은둔자들이나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며 이곳저곳을 다니는 이들에게 ‘제자’는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를 기꺼이 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을 예수님께 기꺼이 드린 세례 요한을 본받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 헌신을 통해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 가는 데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가타부타 이것이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자발적 헌신으로 교회가 세워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가 주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은 기초상식입니다. 축약해서 말씀드리면, 현재 한남교회의 재정이 선교사역을 감당하기에 넉넉하지 않습니다. 더 이야기하면 부담이 되길 것 같아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은 겨울에 피어나는 꽃, 봄의 전위처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전위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공동의회에서 제직과 부서, 자치단체, 성가대, 봉사단, 교육부서, 중창단에 임명받으신 분들은 한남교회의 전위로 부름을 받은 분들입니다. 직분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의 큰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거둠 기도]

창세전에 우리를 향한 계획을 품으시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있어야만 하는 소명을 간직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발 딛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맡은 바 소명이 있기에 우리를 붙잡아주심을 알게 하옵소서. 주신 바 소명을 발견하지 못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주신바 소명을 발견하여 전위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