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대림절 3주 / 성서주일)
기다림은 인내하는 것
야고보서 5:7~10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본문은 그날을 기다리는 이들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온 우주적인 사건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이요, ‘하나님의 정의 평화가 온전히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가 이뤄진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우주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사건으로서의 ‘그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간절하게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이뤄지는 날,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온갖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삶의 충만함을 느끼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 왜, 그날을 기다리는가?

‘결핍’은 그날을 기다리게 합니다.
인류의 발전은 ‘인간의 결핍’을 채우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결핍의 상태’는 복이 될 수도 있고, 결핍이 없는 상태가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분들은 결핍이든 충만이든 복으로 만들어 가시는 지혜로운 분들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에 처하지 않으면 하늘의 소리에 둔감해집니다.
그렇다고 하늘의 소리를 듣겠다고 고난을 자처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고난 받는 것이 싫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원하지 않는 고난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늘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이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고난이 이기적인 나의 자아를 깨뜨릴 때가 그 때입니다. 내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난을 통해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절감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 71절의 시인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계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그 고난 혹은 광야는 우리의 굳어진 신앙과 마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초대일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 서 있을 때, 고난 중에 있을 때, 두려움에 떨지 마십시오. 성서일과 이사야서 35장 1~10절의 말씀은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맥 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라!(사 35:3)’고 하십니다. 파도만 치는 바다는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잔잔하기만 한 바다도 없습니다. 인생은 바다입니다.
예배 전에 들으셨던 ‘광야를 지나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 어두움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 광야 광야에 서있네 /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 광야 광야에 서있네 /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 어두움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곳 광야 /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지난 주간에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무한반복으로 틀어놓고 들었던 찬양입니다.
노래하는 자는 고독하고,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던 사람조차도 나를 떠나 홀로 있을 때, 주님이 손을 잡아 주시지 않으면 파멸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에 손을 내미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하기 위해 광야에 세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광야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결코 홀로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신 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기억하고 광야의 삶을 인내하며 견디는 자만이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죄송한 말씀이지만,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으로 교회가 활력을 잃어버리고, 아픈 분들은 늘어나고, 돌아가시는 분들은 많은데 장례도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하고, 장기 결석하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교우들의 가정에 문제가 있어도 기도밖에는 할 수 없고, 새신자들은 정착하지 못하고...이런저런 생각으로 목사로서 자괴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목회능력이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한다고 나선 것 같아 후회도 되고 그랬습니다.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것입니다. 마치, 홀로 광야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하은이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은이는 2001년 종달교회에서 만난 꼬맹이였습니다. 그리고 하은이가 열 살 때 제가 제주도를 떠났고, 16년이 지났으니 26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던 꼬맹이,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때면 아이들을 바라보던 왕방울같이 큰 맑은 눈에는 눈물이 비췄던 아이, 일 년에 두 번씩 심장박동기를 교체해야하는 수술을 해야만 하던 하은이가 지난 월요일가 월요일 비타500을 사들고 교회에 왔습니다. 어릴 적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지금도 병원에 산다고 합니다. 강동에 있는 보훈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타500 상자에는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쓴 손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하은이의 심장수술 비용마련을 위해 사진전시회를 했던 일들, 종달교회의 목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때 솔직히 섬에 유배된 것 같아 광야에 서 있었던 것 같았는데, 제주도라는 광야에서 저는 비로소 목회자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편지는 목사로서의 자괴감에 빠져있던 저에게 다시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우쳐 주었습니다.
여러분, 광야에 서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인내하십시오. 성서일과 시편의 말씀 146편 5절에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복을 여러분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함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을 상고해 보십시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인내’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인내’라는 단어를 농부가 농사를 짓는 과정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고, 땅의 소출을 기다립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며’ 기다려야 합니다.
지난 주에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그렇습니다. 마침내 너에게로 가는 일, 그것이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씨앗은 농부가 뿌리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고 땅의 소출’을 결정하는 것은 농부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씨앗이 소출을 맺기까지 요구되는 과정이 있고 시간이 있습니다. 싹을 틔우고, 이파리를 내고,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고, 익는 과정들은 ‘기다림’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때론 기다림 끝에 풍성한 소출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땀 흘리며 씨앗을 뿌리지만 주님께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씨앗을 뿌리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귀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걸고 인내하는 이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은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항상 원망의 대상은 ‘나’ 아닌 ‘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전에 나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어느 한 쪽의 문제만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소한 문제가 큰 문제로 비화되는 경우 경우의 대부분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물론, ‘모든 것이 내 탓이요!’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스포츠경기마다 ‘심판’이 있습니다.
카타르 월드컵에 등장한 VAR(비디오 보조 심판Video Assistant Referees)은 사람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까지 정확하게 판단합니다. 그래서 ‘비디오 보조 심판’이 등장한 후에는 심판의 판정에 불복하거나 시비하는 경우가 적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VAR보다 더 정확한 심판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9절에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하십니다. 그러니 원망하지 말고, 그분의 판단에 맡기고, 타인에게 원망할 일이 있어도 원망을 쏟아내지 말고 한 치도 틀림없이 판단해 주실 주님께 희망을 걸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날,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이미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미성숙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때부터, 화해의 길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상대방만 100% 잘못하고 나에게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일’은 없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시고,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중 하나는 ‘인내’인 것입니다.
기다림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아직 인내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인내하십시오.
이제 막 이른 비가 내렸을 수도 있고 늦은 비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땅이 소출을 낼 준비를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아무런 소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소출을 거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서 있을지라도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며’, 새롭게 거듭나는 귀한 경험을 하시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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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우리의 삶이 광야에 내 던져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떨리는 무릎을 굳게 세우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참고 견딤으로 우리의 마음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광야와도 같은 우리의 삶이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우리 삶의 유익함이 될 수 있도록 하옵소서.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도 공급해주실 줄 고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