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대림절 2주 / 인권주일)
그 날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2)
마태복음 3:1~12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 기다림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째주일에는 ‘그날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주 말씀에 비추어 제목을 수정한다면 ‘기다림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란, 자기만 알던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고 이웃, 자연,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은 먼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실 만큼 사랑했던 자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획하신 자신, 여전히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존재로서의 자신,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요, 그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으로서의 자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넘치고 흘러서 이웃에게로 향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 사랑에 이르는 것, 이것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해 보신 분들은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실 겁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자기중심성이라는 옷은 겹겹이 우리를 감싸고 있어서 이 옷을 다 벗어버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리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씀을 깨달아야하고, 그 깨달음이 삶으로 살아져야 비로소 ‘앎’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견지하는 것, 그것이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행동할 때에는 나의 입장이 있지만, 너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숙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숲속의 현자로 불리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이 얼마나 멋지고 성숙한 생각입니까? 자기중심성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확증’에 빠져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자기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합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인들에게 심하게 나타나는데, 자기중심성에 빠진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나라는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까닭은 정치인들의 자기중심성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의 분명한 확신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마십시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 옳다’는 생각은 정치뿐 아니라 종교, 사회, 문화에 암세포처럼 퍼져있습니다. 과도하고도 편향적인 자기 확증을 도려내야 건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저마다 해야 합니다.
먼저 구약 성서일과 이사야서(11:1~10)에서는,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오셔서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나라가 평화의 나라요, 그 나라가 되면 ‘물이 바다를 채우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할 것’이라고 합니다.
시가서 시편 72편은 ‘왕을 위한 기도’입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주님의 판단력과 의를 주셔서, 정의와 공의롭게 백성을 판단하고, 백성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안겨주는 왕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백성을 구하고, 억압하는 자들을 꺾어버리는 지혜로운 왕이 되어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저는 왕을 위한 기도를 묵상하면서 이 나라의 대통령이 정의와 평화를 안겨주는 왕이 되길, 가난한 백성을 구하고 억압하는 자들을 꺾어버리는 지혜로운 왕이 되길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헛헛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에서 고대하는 왕의 역할과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주술과 미신에 빠져 아 나라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가지 않길 기도하십시오.
서신서 로마서의 말씀(15:4~13)에서는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생각을 품고 서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오는 것은 기쁨과 평화이지, 비방과 분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본문은 그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란 ‘메타노이아metanoia)’, 즉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하면서 세례 요한은 또 강조하기를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그냥 마음으로만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술로만’ 회개하는 데 익숙한 삶을 살아갑니다. 게다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제가 종종 드린 질문이 있습니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중에 어떤 죄가 더 중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알고 짓는 죄는 최소한 ‘회’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고 짓는 죄는 ‘회’할 기회조차도 없습니다. 오히려 죄짓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열심히 죄짓는 일을 합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은 다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붙잡고 있는 것들도 정말 옳은 것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내가 최선이라고 내린 결정들도 정말 최선인지 다시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정하여 방향전환을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기다린다고 그 날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고 회개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의 복잡한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가진 이들, 그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세례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가격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자기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깁니다.
‘자기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저 높은 자리에만 앉으려 합니다. 내면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치중합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행불행을 느낍니다. 자기보다 못하다는 판단이 들면 차별하고 혐오하고 얕잡아 봅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사신 거룩한 존재들이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존재들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성전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동역자요, 친구입니다. 하여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인데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그분이 걸어갔던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삶을 흉내 내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기다림의 절기가 다 가기 전에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시는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리고자 힘쓰고, 자기 확증에 빠져 살던 지난날들을 회개하고,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힘쓰는 일은 모두 그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대학시절 한 학기 동안 행운처럼 황지우 시인의 국문학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는 <오감도>와 <날개>라는 시집을 낸 이상의 시만큼이나 참으로 난해한데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난해하지는 않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시가 있습니다. 그 일부를 읽어 드립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중략)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계절이요, 우리가 그를 마중하러 나가는 계절입니다. 그 마중물은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리는 것이요, 회개하는 것이요, 자기정체성을 찾는 것이요,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런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오시는 주님, 속히 오셔서 어두운 이 땅의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주옵소서. 하지만, 그 희망의 빛은 이미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둠을 비추는 빛이어야 함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에 이르게 하시고, 자기정체성을 확립함으로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