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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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23주] 새 하늘과 새 땅

  • 관리자
  • 2022-11-13 18: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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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23주/창조절 11주(20221113)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 65:17~25


누구에게나 ‘사막’이 있습니다.
여행지로서의 낭만적이고 장소적인 ‘사막’이 아니라, 더는 뒤로 물러설 곳이 없는 것과 같은 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사막’말입니다. 내 삶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일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사막’을 경험합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보지만 가위에 눌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막을 경험합니다. 한 개인이 경험하는 사막은 가장 큰 사막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 인지상정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염병이란, 장티푸스를 통속적으로 부르던 말입니다. 요즘이야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과거에는 걸리면 죽는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염병할’이란 말은 ‘염병에나 걸릴’이란 뜻으로, 남을 심히 나무라거나 저주할 때 쓰는 욕입니다. ‘고뿔’은 감기를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고뿔과 염병은 서로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당연히 염병이 중한 병입니다. 그런데 인지상정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지 않아서 남의 염병은 나의 고뿔만도 못한 법입니다. 남의 팔이 썩어 들어가는 것보다 내 손 끝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가 더 아픈 법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타인의 사막’보다 ‘자기의 사막’이 커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 공감능력


그러나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되면, 자기의 사막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사막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공감능력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희노애락’하시며, 그들이 아우성치고 부르짖을 때마다 개입하셔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신약성서의 예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다르지 않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표현하시며 길과 진리가 되셨습니다. 지금은 보혜사 성령의 시대입니다. 보혜사라는 말 자체가 ‘위로자,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공감능력은 의심할 바 없는 것입니다. 
 

■ 공감이란 상호관계성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필요에 공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도우십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그분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우리도 그분처럼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사막과도 같은 나의 삶과 사막과도 같은 이웃의 삶이 만나는 그 지점, 그 즈음에 오아시스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론 내가 오아시스처럼 다가가고, 이웃이 내게 오아시스처럼 다가올 때도 있는 것입니다. 공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compassion’은 ‘com’ 즉 ‘상호관계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상호관계성이란 ‘주고받는’ 즉 ‘give&take’입니다. 


■ 믿음이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받는 데’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다 주셨는데 계속 달라고만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0~31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여러분, 저마다의 사막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당한 때에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신 것처럼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답게 내 사막에만 매몰되지 마시고, 이웃의 사막을 향해서 가십시오. 그때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 이사야서 65:17~25


이스라엘은 B.C.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 시드키야 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B.C. 538년에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고레스)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 정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이사야서 65장은 바벨론 포로기가 끝날 무렵 유배지인 바벨론 강가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주신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조국에 돌아가고 싶지만 갈 수 없고, 들려오는 조국의 소식은 참담하기만 합니다. 설령 포로지에서 조국으로 돌아간들 황폐된 조국을 재건할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차라리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유배지에서 정붙이고 사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사막과도 같은 조국으로 귀환하길 망설이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 왜, 새 하늘과 새 땅인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지금 그대로는 안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지금 현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조국에 살고 있든 포로지에 살고 있든 언약을 맺은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당시 포로로 끌려온 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바벨론 강가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애가를 부르고, 조국에 담아있는 자들은 겨우겨우 연명합니다. 그 상황의 단편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19)’가 들려오고, ‘노약자와 아이들이 죽어가며(20)’, ‘수고하고 노력한 것들을 약탈(22)’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막과도 같은 황량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공감하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입니까?

먼저 ‘수고가 헛되지 않는(23)’ 곳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큰 복은 수고한 대로 먹고 사는 것입니다. 병행본문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에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는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는 자에게 즉 ‘give&take’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25절의 말씀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 의미로 성경 읽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리는 양을 잡아먹어야 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면 죽습니다. 뱀이 흙을 먹고 살지 않습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조화롭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생태계는 순식간에 붕괴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럴 때에는 문자로 읽지 말고 상징으로 읽어야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문자로 읽고 이리와 사자에게 풀을 먹이고, 뱀에게 흙을 먹이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면 허무맹랑한 짓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허무맹랑한 일들이 한국교회에서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경을 문자로 읽는 이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여 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도바울은 문자주의에 빠진 이들을 경고하면서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생각과 상식을 넘어서는 일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충만할 것이요,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좋은 것’이요, ‘최상의 것’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니, 지금 당장 사막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해서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자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누구든지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병행본문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말라기 4장 1~2절의 말씀을 통해서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와 같아서 새 하늘 새 땅에 발 디딜 수 없을 것이라 하십니다. 불놀이를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지푸라기가 얼마나 불이 잘 붙고, 불이 붙으면 얼마나 빨리 사그라집니까? 악한 세상에서 교만한 자와 악한 자는 영원할 것 같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들이 발 디딜 틈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 본대로 서신서 데살로니가 후서 3장 6절에서 ‘게으른 자’도 해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누가복음21장 8절의 말씀에는 ‘미혹 받는 자들’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 악한 자, 게으른 자, 미혹 받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성경에 그날, 때, 심판의 날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날이 임박하면 반드시 ‘미혹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누가복음 21장 18절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아니하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 결론


저마다의 사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매몰되지 마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시오. 사막에 있는 이들을 향해 가십시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에서 사막의 삶을 강요당하는 이웃들에게 다가가십시오. 그 일을 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날은 언제 올지, 오늘 밤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이미, 이런 마음으로 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고 사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고 하십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사막과도 같은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지켜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측원합니다. 아멘.
 

[거둠 기도]


주님, 거친 광야, 사막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소망하며 흘리는 땀방울들을 기억하여 주셔서, 교만한 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게으른 자들이 발붙이지 못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뤄주옵소서. 주님, 사막의 삶을 강요당하는 이웃에게 다가갈 때에 용기를 주시고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 하늘과 새 땅 ppt영상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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