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제18주/창조절 6주(20221002)
염려와 불안에 저항하는 날
마태복음 6:25~34

지난주에는 ‘월터 브루그만과 함께 하는 종교개혁의 달’ 첫 번째 주제로 ‘안식일과 첫 번째 계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요점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네 번째 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강제노동시스템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신자유주의 상품소비 시스템에서 쉼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 관계의 회복 = 회개
성경에서 ‘죄’는 도적적이고 윤리적인 좁은 차원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죄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 이웃과 단절된 삶, 자연과 단절된 삶, 자신과 단절된 삶입니다. 이런 현실을 깨닫고 분열된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결단하고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회개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쉼 없는 시스템에서 쉼 있는 시스템으로 들어가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방법을 제시하셨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인지 아닌지는 인간의 몫으로 남겨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식은 일방적인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이미 베푸셨지만, 그에게로 나아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 대신에 그가 지어주는 십자가를 지고자 결단하는 이들만이 십자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복 주신 날이요, 그 복을 누리고 안 누리고는 각자의 결단인 것입니다. 회개는 돌아섬입니다. ‘U-turn’ 그것은 낡은 생각, 낡은 생활로 인해 단절된 관계들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거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목표를 향해서 우리의 생이 다할 때까지 달음박질하는 것입니다.
■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미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단지 ‘주일성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정신, 본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일예배만 드렸다고 ‘나는 안식일을 다 지켰다.’고 해서도 안 되고, 주일성수를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안식일 정신으로 산다.’고 해도 안 됩니다. 둘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엿새 동안 일상에서 안식일 법에 따른 삶을 살아가고, 하루는 주님 앞에 나와 재충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이 그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파라오의 강제노동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야훼 하나님의 쉼의 시스템’을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주일성수와 일상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미는 일상을 ‘안식일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알랭 드 보통은 문학과 철학, 역사, 종교, 예술을 아우르며 일상의 가치를 발견하는 에세이 《불안》에서 인간이 왜 불안해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분석합니다. 모든 불안은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힘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은 사람들은 세상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보고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곧 속물근성이라는 것을 알기에 불편해지고, 그런 불편함이 존재하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것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모든 것이 ‘불확실성’ 속에 빠진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결핍을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부와 명예로 채우려는 보통의 인간은 ‘불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부와 명예를 갖지 못했을지라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최소한 나를 인정해주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으며, 나를 목사로 인정하는 교인들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하는 생각입니다.
■ 파라오(pharaoh)의 ‘불안’
파라오는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지녔으며, 신의 대리자로 절대 권력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통찰대로 ‘불확실성’ 속에 빠지고, 그 불안을 채우고자 끊임없이 착취하는 강제노동을 통해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끝없이 불안해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협하는 기근을 피하려고, 끊임없는 강제노역으로 곡물창고를 짓고, 빈 곳간을 채우기 위해 노예들에게 가혹한 빈곤을 강요하고, 노동과 생산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한 불안은 자기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드는 강제 노역을 일상화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파라오의 ‘불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 야훼 하나님의 ‘대안’
이런 이집트의 강제노동 시스템에 대한 대안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실 때에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네가 종으로 지냈던 집에서 이끌어 낸” 분으로 선언하셨고, 이 선언은 이집트의 파라오를 기억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기억을 통하여, 다시는 노예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백성들은 일제히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 결단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무엇을 요구하실지 알 수 없지만, 파라오가 요구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들을 광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고자 했을 때에도 이집트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법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 안식일 법
안식일 법은 파라오의 불안의 지배하는 사이클을 깨뜨리는 법이었습니다. 오로지 ‘신’만 존재하던 이집트의 악법과는 다르게 ‘이웃’이라는 존재, 이웃 중에서도 ‘사회적인 약자’로서 언제든지 자신들이 경험했던 노예생활로 전락할 수 있는 이웃을 배려하는 법이 안식일법에는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에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부연설명에는 이집트에는 없는 법이 포함됨으로 파라오의 불안이 지배하는 사이클을 깨뜨린 것입니다.
안식일, 쉼을 통해서 얻은 ‘힘’은 생산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용되었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감으로 학대를 일삼던 시스템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일중독에 걸리신 분도 아니시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보며 불안해하는 분도 아니시고, 평화롭게 쉬실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쉼’의 삶을 주시기 위해 안식의 날을 복 주신 것입니다.
■ Pharaoh vs YHWH
파라오를 따라 사는 삶과 야훼를 따라 사는 삶은 전혀 다른 삶의 양태로 나타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파라오를 닮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길들여 살고자 한다면, 파라오의 시스템이 주는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표로 보시겠습니다.
|
Pharao |
YHWH |
|
불안 죽음의 시스템 이웃의 상품화 |
쉼(안식) 생명의 시스템 이웃과의 관계성 회복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법을 통하여 “너희가 안식일을 지키면 학대를 일삼는 시스템으로부터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법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는 “생산과 소비에만 몰두하는 파라오의 판박이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십시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염려는 이방인들의 염려라고 명토박습니다. 이런 이방인의 염려가 곧 파라오의 염려요 불안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모든 이방인의 염려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살피시고, 들의 백합화,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니 그런 것에 매몰되지 말고 큰 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연연하며 사는 이들의 삶은 염려와 불안과 온갖 두려움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안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큰 뜻을 품은 이들은 그 큰 뜻,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임을 알기에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세상의 온갖 염려와 불안에 저항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재충전의 날이요, 대안의 날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결핍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이 결핍을 채우면서 발전해 왔고 개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핍을 인식하는 것과 불안과 두려움 염려에 빠져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도 될까?”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우리에게 ‘안식의 삶’을 앗아갑니다. 끝없는 경쟁으로 우리를 내몰며,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난 하나님께서 주신 법은 경쟁의 법이 아니라 ‘더불어 삶’의 법입니다. 어떤 법을 따라 살아갈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따라 살아가시길 원하시지만, 그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지혜로운 선택을 하신 분들이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강요하는 온갖 염려와 불안을 극복하는 길, 그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 있음을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아멘!
쉼을 잃어버린 시대, 온갖 염려와 근심 걱정에 빠져 살아가는 이 시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이러한 세상 풍조를 거스르는 출애굽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그렇게 살고자하는 이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교회가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염려와 불안에 저항하는 날 / ppt영상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