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제16주/ 창조절 4주(20220925)
공감-관계의 회복
누가복음 16:19~31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여러분, 귀하신 분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제자들과 순교자들의 헌신과 1953년 이후 67년 동안 한결같이 한남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시고 봉사하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영국의 시인이요 설교자인 존 던(John Donne)은 “누구도 외딴 섬일 수 없다”(No one is an island)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홀로’ 살아갈 수 없고, 관계성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시입니다. 설령, 무인도에 산다고 할지라도 자연과의 관계성을 유지할 때 살아갈 수 있으니, 어느 누구도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신고 온 신발은 몇 명이 수고해서 생긴 것일까요? 100명, 100만 명? 아닙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수고해서 생긴 것입니다. 고무나무를 심은 사람, 고무를 채취하는 사람, 채취하는 기구를 만드는 사람, 제철을 하는 사람, 고무를 싣고 오는 배를 만든 사람, 배 만들기를 위해 연구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먹을 양식을 생산하는 농부, 신발을 파는 사람, 신발을 운반하는 트럭을 만든 사람, 고속도로를 건설한 사람, 배를 만든 사람....비행기를 만든 사람...그 사람들이 입을 옷을 만든 사람... 이렇게 수없이 많은 사람이 없다면 이 신발을 내가 신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신발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뿐 아니라 물, 불, 흙, 공기를 비롯한 우주의 모든 것들에게도 고마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림자노동’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됨을 잃지 않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에서 가르치는 것 중에 ‘삼경 사상’이 있습니다. 경천, 경인, 경물이 그것인데,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동식물이나 무생물까지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세상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대에 ‘누구도 외딴 섬일 수 없다’는 멋진 생각이 널리 퍼져서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사는 따뜻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스플랑크니조마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섬김의 삶을 사실 때 아픈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때마다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헬라어로 ‘내장학’의 어원이 된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애간장이 타다, 불쌍히 여기다, 함께 아파하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 중 병든 자, 귀신이 들린 자,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귀하게 창조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귀한 존재인데 이런저런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편견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채 소외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신 것이고, 그들의 삶을 회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며 이웃뿐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셔야할 일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치유의 기적이 많은 이유는 메시아의 표징이기도 했지만, 병에 걸려 모든 관계성을 상실한 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따스한 마음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 복음 - 타자와의 관계성 회복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지었을 때 일어난 일들은 관계성의 단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땅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성이 모두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단절된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기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관계성의 회복은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와 관련된 단어로는 성실하심, 자비하심 같은 것이 있는데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고도 표현합니다. com은 ‘함께’라는 뜻으로 ‘타자와의 관계성’를 의미하고 라틴어 passio는 ‘고통 혹은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compassion은 ‘함께 아픔을 나누다, 공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 타인의 아픔에 무심하면 결국 그 아픔이 자신을 찌르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본문에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기는 부자와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잔칫상에 떨어진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하는 거지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둘 다 죽었는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통해서 손가락에 물을 찍어 자기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부자는 여전히 지옥에 가서도 거지 나사로 같은 이들이야 자기가 맘대로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가한 일입니다. 그러자 “나사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 고통 받는 이곳에 오지 않도록 증언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이 있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 삶의 지침을 알려준들 그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를 보면, 부자가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없고, 나사로가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즉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 이유는 가난한 자와 부자라는 이유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거,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간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는, 가난한 자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곁에 있는데 무관심한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한 것이 죄가 아니라, 그렇게 잔치를 하면서도 집 대문 앞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는 나사로에게 무관심 한 것이 죄였던 것입니다. ‘관심’이란, ‘볼 관’자에 ‘마음 심’자이니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관심은 볼 마음이 없으니 자기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영적으로 눈이 먼 것입니다.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마태복음 6장 23절의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살면서 모든 영역에 다 관심을 두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을 뜨면 우리가 관심을 두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자기의 한계로 다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약자,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신음하는 피조물들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끊임없이 우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타자들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둬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안이 열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공감하는 자의 것이다
부자는 죽었던 나사로가 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경고하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고, 자신과 같이 지옥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다 말하였다. 그런데도 듣지 않았다면 나사로가 살아나서 전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미, 부자도 살아생전에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문제는 그 말씀을 흘려듣고, 자기에게 주어진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기에만 바빴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자기의 대문 앞에서 굶주리고 있는데도 매일 자색 고운 옷을 입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이웃의 아픔에 무관심한 사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후에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보험들 듯이 선심을 쓰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감 혹은 관심’이며,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이므로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는 공감하는 자의 것이다.’ 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삶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듣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득할 수 없습니다. 듣고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 될 것입니다. 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딴 섬이 아니다.’ 수많은 그림자노동에 빚지고 있다. 이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공감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인간의 최고 덕목 - 공감
공감능력은 인간을 인갑답게 만드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compassion을 해석할 때 ‘공감’이라고도 하지만, ‘자비’로도 번역하는데 동양 사상에서 인간의 최고 덕목은 자비입니다. 공감은 단순한 동정심과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공감은 그저 시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이 나와 관계성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자비’를 입음으로 ‘자비’를 배웁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누군가의 헌신적인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생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인간됨은 자신이 받은 자비, 부드러운 사랑,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 타인의 약점까지도 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공감 혹은 자비’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생명의 온기요,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최고의 덕목은 공감인 것입니다.
■ 석학들의 주장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라는 책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공감하는 종’이라고 합니다. 서로 경쟁하고 정복해서 인류의 역사를 이룬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삶’을 통해서 역사를 이룰 수 있었고, 그 바탕에는 ‘공감하는 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이론을 펼쳤던 다윈도 말년에 ‘고등동물 가운데 사회성이 있고 감정이 풍부하고 동료의 곤경을 걱정할 수 있는 종만이 살아남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최배근 교수는 <호모 엠파티쿠스가 온다>라는 책에서, 미래사회는 ‘초연결 시대’가 될 것인데 이 시대를 이끌 인간은 ‘공감형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각자도생의 사회, 개인주의 사회로 치닫고 있습니다. 공동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 ‘초연결’사회가 될 것이고, 홀로 선 개인들은 ‘타자와의 관계성’을 끊임없이 갈구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이버 공간일 수도 있고 가상의 공간일 수도 있지만, 교회는 그 공간을 오프라인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 공감의 시대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섬이 아닙니다. 100명, 100만 명을 넘어서는 온 우주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까지도 우리를 도와주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 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감사하고, 공감하며, 타자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여기에서 살 뿐 아니라 미래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