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제12주(20220828)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갚아주시는 삶
누가복음 14:1, 7~14
독일에서 많이 사용되는 관용구 중에서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라는 말이 있답니다.
코끼리가 도자기 박물관에 잘못 들어오게 되었는데, 코끼리가 움직일 때마다 도자기는 박살납니다. 코끼리가 도자기를 깨뜨려야하겠다는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있어서 생기는 사단입니다. ‘잘못된 만남’을 지적하는 관용구입니다. 앉을 자리와 설자리를 알지 못하면 본인도 주변 사람도 모두 피곤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설 자리와 앉지 말아야할 자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상석에 앉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치 코끼리가 도자기박물관에 들어간 것처럼, 본인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의도하지 않게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는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라는 관용구를 통해서 지혜로운 사람은 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앉을 자리’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초대에 응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예의주시하며 행동과 말 하나하나 주시합니다. 그러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슨 흠을 잡아 예수님을 옥죄고자 ‘안식일 밥상’에 예수님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결혼잔치에 초대 받아 상석에 앉았다 창피를 당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지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자만심이나 오만에 대한 경고나 조언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의 말씀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특정할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 다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의 말씀이니 유추를 해보겠습니다.
상석이란, 주인의 눈에 드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를 풀면 ‘상석’이란, 하나님의 눈에 드는 자리입니다.
초청받은 집에서 주인에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앉으려는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는 상석을 차지하려고 안달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도 보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고, 정결을 유지하며, 열심히 기도하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안달을 했습니다. 주목받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기도시간이 되면 거리로 나가서 보란 듯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신실한 신앙을 하나님이 지켜보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길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몸이 불편한 이들이나 저는 자들이나 맹인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월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신들보다 못났다고 생각하여 당신들이 보이지도 않은 구석자리로 내쫓은 그 사람들이 당신들이 앉아있는 상석에 앉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온다고 자부했습니다.
‘바리새’라는 이름 자체가 ‘구별하다’라는 뜻이고, 구별된다는 것은 곧 ‘거룩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구별하여 틀림없이 지킴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종파가 바리새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확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잘 지켜서, 스스로의 노력과 행위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는 없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나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의 선물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오는 것입니다. 선물은 보상이 아니라 받을 자격조차 없는데도 내게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선물을 준 이에게 감사하고, 선물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지금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 그래서 구원의 은총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만한 생각에 빠져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마치 상석에 앉으려고 다투는 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고 이런 사람들이 상석에 앉으면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처럼, 사악한 의도 없이도 도자기 박물관을 초토화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모해하고, 고발하여 십자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역을 담당합니다.
이렇게 상석에 앉으려는 이들은 ‘교만한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순위입니다. ‘교만’과 관련한 성구를 몇 개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22장 28절 /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시편 18편 27절 /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베드로전서 5장 5절 /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단순히 겸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교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온전히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이 교만의 의미입니다. 이 지점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내 삶을 책임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교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을 대별하면, 나 스스로 사는 삶이 있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삶이 있습니다. 겸손한 삶이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높이는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3~14).”
너무 짧아서 비유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말씀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은 당시에 죄인들로 분류되던 이들이었습니다. 상석에 앉으려 다투던 바리새인들이 자신과 그들을 구별하여 금을 긋고 ‘의인과 죄인’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의인인 자신들은 주인이 잘 보이는 상석에, 죄인인 그들은 주인의 눈에 띄지도 않는 말석에 앉히거나, 아예 잔치에 초대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석에 앉아있거나 초정대상에도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주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복을 누리십시오. 가난한 자들, 사회적인 약자들을 환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높여주시고 갚아주실까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이니 죽은 후에 높여주시고 갚아주실까요?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한 이해가 좀 빈약합니다. 우리는 늘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라는 주님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의 뜻은 우리가 죽은 뒤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이유는 ‘하늘’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까지도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 나라까지도 만들 수 있으며, 스스로 구원까지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런 사조를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계몽주의와 인본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위해 기여한 바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하나님보다 더 상석에 앉혀 놓음으로 끼친 해악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아주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초대받은 잔칫집에서 상석에 앉으려고 다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의도하지 않게 박물관에 들어간 코끼리처럼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삶뿐 아니라, 이웃의 삶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갚아주시는 삶으로 들어가십시오.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을 만큼 높아질 것이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선물을 받고 살아갑니다. 마음의 눈을 뜨셔서 그것을 발견하십시오. 구상 시인의 ‘마음의 눈만 뜬다면’ 일부를 읽어드리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마음의 눈을 뜬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
그 실용적인 이름에서 벗어나
저마나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 없다
무심히 보아오던 마당의 나무,
넘보듯 스치던 잔디의 풀
아니 발길에 차이는 조약돌 하나까지
한량없는 감동과 감격을 자아낸다.

[거둠 기도]
주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 스스로 높아지려하는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매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높여주시고 갚아주시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갚아주시는 삶 PPT 설교
제목을 누르시고 확인을 누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