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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제11주] 안식일은 저항이다

  • 관리자
  • 2022-08-2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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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제11주(20220821)
안식일은 저항이다
이사야 58:9~14


■ 네 번째 계명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 쉼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부터 기인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쉼 없이 강제노역에 혹사당하던 하피루를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그중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네 번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어떤 계명에는 주석처럼 계명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강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계명에는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주석이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 중에서 가장 긴 주석이 붙은 계명은 네 번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거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세세한 주석이 붙어 있은 ‘안식일 법’은 복된 날이요, 구분된 날, 거룩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지킴으로 오늘날의 교회는 안식일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담아 ‘첫째 날’을 주일로 지킵니다. 
 

■ 한 주간의 시작은 언제인가?


세상은 쉼을 마치고 일을 시작하는 월요일부터 한 주간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일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서의 시간은 쉼으로부터 한 주간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세상의 시작은 아침이지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루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입니다.

성서는 ‘쉼’을 통해 ‘새 힘’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하피루에게는 365일 쉼이 없었습니다. 파라오를 위한 강제노역에 쉼 없이 시달림을 당하던 하피루가 아우성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출애굽시켜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한 하피루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민족’ 이스라엘이 되었고,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살아가겠다는 계약을 십계명을 통해서 재확인한 것입니다. 그중에서 네 번째로 주어진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성과주의에 사로잡힌 파라오의 쉼 없는 강제노동과는 전혀 다른 ‘쉼’이라는 점에서 파라오의 성과주의에 대한 ‘레지스탕트’ 즉 ‘저항’인 것입니다.   
 

■ 무거운 멍에를 자청하는 인간


안식일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날’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시작한 한 주간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 힘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 쉼 없이 살아가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삶의 무거운 멍에를 매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대별하면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힘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하는 삶입니다.




모두가 선물처럼 주어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좋아할 것 같지만, 이 세상은 ‘선물’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불어오는 바람, 새 소리, 봄에 피어나는 꽃, 밤하늘에 빛나는 별, 맑은 물, 숲...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인데, 사람들은 그런 선물에 더는 감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무미건조한 삶은 결국, 자기 혼자서 세상의 모든 멍에를 매고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을 ‘책임적인 인간’이라 칭송하는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자신에 삶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삶은 조금의 실수나 허점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공과 실패는 ‘자기의 책임인 동시에 자신의 몫’입니다. 이것이 ‘각자도생’의 사회가 우리에게 던져놓은 덫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책임이요, 몫이므로 ‘실패’하면 오롯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단 한 번의 실패’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칠전팔기’나 ‘개천에서 용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가 주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라고 하시며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안식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인간 스스로 자기의 삶을 주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 풍조 때문입니다.
 

■ 과학만능주의의 허구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저항으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에서 이런 우리의 시대상을 분명하게 진단합니다.

‘우리는 선물 받기를 기대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고, 얻으며, 소유하는데 아주 익숙하다.’

마치 쇠락한 ‘자유주의 신학’이 다시 살아난 것 같아 섬뜩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 심지어는 하나님 나라까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오만함은 제2차 대전을 겪은 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 망령이 ‘과학만능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부활했습니다. 과학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과학만능주의는 우리에게 쉼 없는 삶을 강요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체득하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COVID-19로 시작된 팬데믹은 이런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후변화와 인순전염병의 창궐을 통해 그들이 주는 메시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들은 인류에게 쉼 없는 삶, 끊임없는 경쟁, 탐욕과 온갖 소유욕에서 벗어나 자족하는 삶, 온갖 그림자노동에 감사하는 삶, 타자를 환대하는 삶, 소수자들을 혐오하지 않는 삶, 자연을 약탈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100년 전 지구는 80%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야생의 공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단 20%만 남았다고 합니다. 자연 스스로의 자정 능력이 없어진 것이지요. 인간은 지구의 ‘자정 능력’이라는 선물을 발로 차버리고, 과학발전을 통해 지구를 되살릴 수 있다고 혹은 지구가 멸망해도 다른 외계행성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선물을 선물로 받으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 제국의 허구를 벗어버리라(사58:9~12)


하나님께서는 제국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를 위해 마음을 쓰고, 괴로움 속에 빠져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감하면 네가 부를 때에 응답하겠고,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10)’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은 제국 바빌론이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간질시키고, 자신들에게 복종하게 하려고 세뇌교육의 결과로 파생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무거운 멍에가 된 것입니다. 그 멍에에 짓눌려 살아가다 보니, 환대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들을 제하여 버리고, 즉,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리고 그 제국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실 하나님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고, 뼈를 견고하게 하고, 물 댄 동산처럼, 샘이 멈추지 않는 샘물처럼(사 58:11)’살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을 무겁게 하는 멍에의 정체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맘몬의 세상이 주입시킨 것인지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멍에를 벗어버렸을 때, 어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그러나 여전히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짖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짖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 천천히, 느릿느릿 살아도 충분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맘몬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쉼 없이 달려가지 않아도, 숨차지 않게 달려가도, 충분히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쉬엄쉬엄, 천천히 느릿느릿 살아가면 빨리빨리 달려갈 때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고, 경탄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쉼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쉼없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저항입니다.



저는 산에 오를 때 천천히 걷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기쁨도 있지만, 숲길 여기저기에 있는 신비스러운 꽃들과 풍경들을 보느라 걸음이 늦습니다. 정상만 바라보고 빨리빨리 올라가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니 숨차지 않습니다. 산에 머문 시간은 같은데 저는 더 많은 비경을 본 것이지요. 천천히 걷는 사람에게나 뛰어가는 사람에게나 하루라는 시간은 다르지 않습니다. 먼 길을 간 것이 성공한 것인지, 먼 길은 가지 못했어도 많이 본 것이 성공한 것인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목적지보다는 목적지를 향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혜를 가지시라고 권합니다. 천천히 느릿느릿 살아도 충분합니다.


▪ 안식일을 지키면


13절과 14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복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13절에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네 길, 네 오락, 사사로운 말’이 무엇일까요? ‘네 길과 네 오락을 위해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부추기는 말이 ‘사사로운 말’이고, ‘네 길과 네 오락’은 맘몬의 세상이 요구하는 성과주의와 연관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안식일에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른들은 오락이나 레저, 스포츠, 문화행사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네 길과 네 오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나쁘다, 죄라고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안타까운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즐거움과 높여주심이 있는데, 자기 스스로 온갖 멍에를 다 짊어지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 안식일은 저항이다


과학만능주의와 제국의 허구가 주는 무거운 멍에에 저항하십시오. 소유를 부추기고 불안을 조장하는 모든 일에 저항하십시오. 세상의 모든 강요에 저항하십시오. 그리고 공감하고 관용하며 환대하지 못하게 하는 온갖 배타주의에 저항하십시오. 이것이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저항입니다. 

‘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빨리빨리 스피드 세상, 성과주의 세상의 희생자가 되지 않고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구분하여 복 주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참된 쉼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창조주 하나님, 쉼 없는 강제노역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을 부르시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하시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쉼 없는 삶을 강요하는 세상이지만, 주님께서 주신 안식의 시간을 통해서 ‘참된 안식’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옵소서. 또한,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PT영상설교 안식일을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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