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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제5주]서로가 서로에게 사마리아인

  • 관리자
  • 2022-07-10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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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5주(20220710)
서로가 서로에게 사마리아인
누가복음 10:25~37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예년보다 보름 이상 빨라진 열대야 속에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오늘 교회언덕을 올라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과거에는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교회라는 의미로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교회를 짓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남교회도 1984년 이 성전을 지을 당시 제법 높은 곳에 건축을 했고, 아파트가 생기기 전까지는 사방에서 교회가 잘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 낮은 곳에 교회를 많이 짓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 교회들이 겸손하게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어느 날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아주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즉 곤란하게 하려고 한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였습니다. 그런데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질문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해야할 ‘이웃’은 비판하고 미워해야할 ‘원수’를 사랑하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이웃’은 ‘유대인’이었으며, 그의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은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은 ‘온 세상 만민에게 은총을 내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생각의 간극이 있기에 어떤 대답을 내어놓아도 율법 교사는 흔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의 불순한 동기를 아셨음에도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율법에 뭐라 기록이 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답게 막힘없이 대답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대답에 긍정하시며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는 곤경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던진 함정 질문에 자기가 빠진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대로 행하여라.”하시는 말씀을 뒤로하고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 끝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깁니다. 그리고 율법 교사에게 반문하십니다. “누가 이 셋 중에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질문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질문이 달라졌으니 대답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 강도만난 자는 누구인가?




강도에게 습격당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고 했으니 일단, 사마리아인은 아닐 것입니다. 가능성은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일터인데, 이 이야기가 율법 학자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강도만난 자는 ‘유대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 속에는 단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에 머물지 않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은 “누가 강도만난 유대인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이 됩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강도 만난 유대인이 원수처럼 지내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이웃을 받아들이면 살 수 있겠지만, 끝내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길가에 버려져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쯤 죽은 상태로 버려진 강도만난 사람 옆을 지나가는 이들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만져봐야 하는데 만일 시체라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정결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관리인이었던 두 사람은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정결법을 지키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게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면서 자신들도 강도를 만나지 않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을 속히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이 되어야할 유대인은 그냥 지나갔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돕습니다. 이것을 거절하면,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도만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당시 이방인, 그 중에서도 사마리아인이라면 개보듯이 하던  율법 교사에게 사마리아인들, 너희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너희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너희가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우리는 누구를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오늘 우리의 현실에 이 말씀을 적용시켜보겠습니다.
이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아십니까?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폭염 속에 에어컨도 없는 비닐하우스에서 선풍기를 의지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이주민노동자들이요, 불법체류자들입니다. 요즘 농촌에서는 대부분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데, 이주민노동자들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소위 3D업종(Dangerous, Dirty, Difficult)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묵묵히 견디며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이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들이라고 혐오하고 차별하고, 불법체류자 신세라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일을 부려 먹습니다. 그리고 한 여름에는 사우나탕보다도 더 더운 곳에 방치하고, 겨울에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동사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그들의 이웃이 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라고 하여 온갖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약자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은 상태로 버려졌다가 이웃이 없어 고통 속에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율법 학자처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알지만, 자기의 관념 속에 갇힌 이웃, 제한된 하나님의 은총 속에 머물러 있는 반쪽짜리 신앙인이 되기가 훨씬 쉬운 종교적인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갈등보다도 더 심한 상황입니다.
 

■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역사


본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하나의 민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12지파가 땅을 분배 받아 다윗 왕 시절 최전성기 구가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기원전 930년경에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단됩니다. 분단되고 200여년이 지난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멸망을 당합니다. 앗시리아는 수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강제로 혼인정책을 시행했고, 11개 지파가 속해 있던 북왕국이스라엘은 순수혈통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남왕국 유다는 순수혈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개 같은 놈’ 취급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본래 한 민족이었지만 ‘견원지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00여 년이 지나 유다도 신흥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렇게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 서광이 비춥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고레스 왕이 기원전 550년 경 칙령을 내려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라 독려하며 재정적인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돕기를 원했지만, 유대인들은 단칼에 거절하고, 성전을 봉헌할 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 유대인들은 그것이 사마리아인의 소행일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민족이었지만, 거의 원수처럼 지내서 사마리아인과 대화를 하는 것도, 그 지역을 통과하는 것도 율법으로 금지했습니다. 이런 일은 분단된 후, 거반 400년 정도 지난 후의 일이요, 예수님 당시까지 오면 850년 이니 갈등의 역사가 엄청나게 길었습니다. 그러니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했고, 도저히 이웃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선한 사마리아사람이 손을 내민 것이요, 그 손을 뿌리치고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도 만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어라’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 닮은 꼴 한반도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은 분쟁지역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주장하고, 자신들이 그 땅의 합법적인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증오의 역사를  언제 끊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입니다. 1945년 해방이후, 77년째 분단된 조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77년은 850년 혹은 거기에 2000년을 더한 2800년에 견줄 것이 못되지만, 남과 북이 서로를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원수처럼 여긴다면 우리도 팔레스타인 분쟁지역과 같은 불행한 상황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우리가 삽니다. 그들을 원수로 대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막인 담을 헐고 둘이 하나가 되는 일, 더는 군비경쟁이 아니라 평화협정을 맺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성장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힘쓰는 것은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은 율법 교사가 생각하듯이 유대인들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웃은 율법 교사가 생각했던 유대인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온 세상에 펼쳐져야 하고, 우리의 이웃사랑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자 할 때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강도만나 버려진 이처럼 죽어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는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하면서 기억해야할 것은 ‘내가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여 살 길이 열린 강도 만난 사람처럼, 우리도 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살 길이 열린다는 긴박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의 도적적인 의무는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순간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타자의 얼굴은 낯선 얼굴입니다. 하지만 그 얼굴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관계를 맺자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초대의 손길에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난당하는 피조물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지고 말씀을 드립니다. 손을 내미는 그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이요,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면, 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그동안 우리는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데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강도 만난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 타자, 낯선 얼굴’이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일지 배척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는 살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죽음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영생의 삶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아멘.
 

[거둠 기도]



주님, 혐오와 차별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우리 모두가 죽는 길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상처를 보듬게 하옵소서. 주님, 나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넘쳐나게 하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다다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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