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2주(20220619)
너는 하나님을 기다리라
시편 42:1~11

지난봄부터 6월 중순까지 한반도는 극심한 가뭄으로 타들어갔습니다.
쥐똥나무 꽃이 필 무렵에 매봉산 산책을 했는데, 애써 올린 꽃망울들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쥐똥나무의 향기가 없는 봄은 쓸쓸했습니다. 나무들도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하이츠빌라 올라가는 길 오른 편에 있는 대나무 숲의 대나무가 누렇게 타죽었습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어떤 곳에는 폭우가 내리고, 어떤 곳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으니 열대지방의 스콜현상을 보는 듯합니다. 그나마 지난 주 간헐적으로 내린 소낙비 덕분에 조금은 생기가 돌아왔습니다.
물이 없으면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사람도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문명도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이라는 단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진리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또한, 인간의 죄를 씻는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2)’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시작되기 전부터 ‘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빛을 창조하신 후에 둘째 날에 물과 물을 나누셔서 창공을 만드십니다. ‘빛과 물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야 온갖 씨앗과 생명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는 에덴동산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10절에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과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강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창세기의 저자는 인류의 기원이 당시 고대근동의 신화에서처럼 잔인하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물’로부터 평화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는 표시랍니다. 제때 몸에 수분을 공급해줘야 신체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는데, 갈증은 느끼지 못하면 비상사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도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영적비상사태입니다. 갈증을 느낄 때 생수가 아닌 탄산음료를 먹으면 갈증이 금방 해소되는 것 같지만 이내 다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갈증은 오르지 ‘맑은 물’로만 풀 수 있습니다. 인스턴트 음료가 임시처방이듯이 영적인 비상상태에서 생명수이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풀려고 하면, 이내 다시 꼬여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갈증은 느끼는 것이 건강하다는 증거이듯, 시편의 시인처럼 하나님을 갈망하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입니다.
타는 목마름 끝에 물을 마시면 물의 참맛을 아는 것처럼, 간절히 소망하는 중에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물이 건강한 육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분이십니다. 물 없이 인간이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한 갈망은 건강한 신앙인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심성입니다. 오히려 그런 갈망 없이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번 주일 성서일과 시편 42편의 말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입니다.
1절의 말씀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나이다.”는 복음성가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마스길’입니다. 마스길은 음악용어입니다. 그리고 ‘고라자손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고라가 누구입니까?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주동자로 멸망당했던 사람입니다(민 16). 그런데 그 후손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를 지은 이들에게도 변함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갈망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때 여러분의 삶은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에게 반란을 일으켜 멸망당한 고라의 자손을 멸절시키지 않고 남겨두셔서(민 26)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시길 원하십니다. 그분의 노래를 부르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는 고라자손의 노래지만, 모티브는 ‘도망자 다윗’에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인지, 왕위를 노리는 자식들에게 쫓길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랑하는 다윗의 애가’입니다. 애가는 ‘슬픈 노래’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난의 때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름철 몹시 덥고 물도 부족한 상황에서 쫓기는 다윗, 다윗을 잡으려는 이들은 물이 풍부한 곳에 잠복해서 물을 길러오는 다윗을 잡을 계책을 세웠을 것입니다. 샘이나 시내가 있어도 물을 얻으러 그곳에 가질 못하니 목마름은 더욱 더 합니다. 마치 겁 많은 사슴이 맹수들 때문에 몇 개 안되는 물 공급원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간절하게 시냇물을 찾는 것과 대적하는 이들이 자신을 비웃고 죽이고자 쫓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시인의 마음을 절묘하게 연결시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핍박을 받을 때 카타콤에 숨어 지냈습니다.
카타콤은 라틴어 ‘가운데(cata)’와 ‘무덤들(tumbas)’이 합성되어 ‘무덤들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만든 것이 카타콤이 아니라, 인적이 뜸한 무덤 가운데 있는 동굴들과 공간에 핍박을 당하던 초대교회 교인들이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카타콤 벽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 의미는 ‘목마른 사슴처럼 주님을 갈망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암호처럼 사용되던 ‘물고기’모양이 있습니다. 물고기 모양도 물론 카타콤 벽화에 있습니다. 물고기 문양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착안한 것일 수도 있고, 물고기는 물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모든 사람은 ‘생명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슴과 물고기’의 상징을 통해 ‘생명수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분의 얼굴을 뵙기를 원합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근원을 갈망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존재에 대한 갈망을 잃었다면 그는 자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면 삶의 목적도 잃어버립니다. 목적도 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갈망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잃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기 존재성을 굳게 지키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지가 없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흔들리며 살아가는 이들을 낚아채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탄산음료 같은 것들을 제공하며 ‘갈증’을 풀어줄 듯 유혹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우리의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 없습니다. 단맛은 갈증을 풀어주는 것 같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하기 마련입니다.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맑은 물’입니다. 시인은 그 맑은 물을 ‘하나님의 얼굴’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22절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도 있고, 이사야 선지자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쇠얀 키르케고르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끔찍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빛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순간 자신의 모든 죄가 드러나므로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인의 현실이 죽음보다도 더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대적자로부터 조롱을 당합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조롱이 아니라 반복됩니다. 원수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비웃고 조롱합니다(3, 10). 그 소리에 시인의 뼈가 부서지는 것과도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하여 시인은 낙심하고 밥 먹듯이 눈물을 흘립니다. 시인은 이런 아픔을 과거에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며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서 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조롱당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일 때문에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거나 낙심하거나 슬퍼서 웁니까?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조롱으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납니까? 억울해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의 눈물이 납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일어난 사단인데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까?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겨우겨우 연명해가고 있는데 뒷짐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세상의 조롱과 비난에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하시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한남교회를 꿈꾸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하는 칭찬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조롱으로 인해 뼈가 부서지는 것과도 같은 상황에서 절망 속으로 빠져들지 않습니다. 5절과 11절의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흘리던 눈물을 거두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지만,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다림, 찬양, 기도’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실패했을 때, 절망적일 때, 낙심될 때에 주님을 기다리세요.
오히려 그때에 주님께 찬양을 올리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기다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홀로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편 42편의 말씀으로 만든 찬양이 있습니다. 함께 부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 합니다.
금보다 귀한 나의 주님 내게 만족 주신 주
당신만이 나의 기쁨 또한 나의 참 보배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 합니다.
[거둠기도]

우리 삶의 방패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기쁨이 되시는 주님, 인생의 여정길에서 힘든 일을 만나 삶이 뿌리째 뒤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을 갈망하며 기다리게 하시고, 찬양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주님께 회복시켜 주시는 귀한 삶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