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1주(20220612)
부끄러움 없는 소망
로마서 5:1~5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은 때론 숲과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다가가지만, 어느 새 홀연히 사라져 버리게 될 때 실망하고 신기루를 바라보고 걸어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은 곧 ‘생명’이요, ‘그늘’은 ‘쉼터’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는 지속해서 여행을 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신기루만 바라보고 여행한다면, 지쳐 쓰러져 여행을 마칠 수 없을 것입니다.

순례의 길, 신앙의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에 오아시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실망할 것입니다. 신기루에는 갈증을 풀어줄 물도 없고, 지친 몸 쉴 수 있는 그늘도 없습니다. 오아시스에서만 물과 그늘을 만날 수 있고,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기루 신앙에 빠져 죽음의 길로 달려갑니다. 신기루는 오아시스의 복사판 같습니다. 그래서 물과 쉼터가 절실한 이들에게 더는 더 생생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루가 그들의 절실함을 채워주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여기에 살지만 늘 저기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까르페 디엠!’을 수없이 다짐하지만, 내일에 대한 소망과 단절된 오늘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유한성을 가진 존재지만, 늘 ‘내일의 소망’을 품고 사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도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 그것이 마치 ‘신기루’같은 것이라면 부끄러운 소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입니다. 개역성경으로 읽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희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고, 원문성경에는 “소망은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스토리성경에서는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서는 “우리는 결코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은 신기루 같은 부끄러운 소망이 아니라, 부끄럽지 않은, 실망시키지 않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망을 품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말미의 구절부터 하나하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부끄러움 없는 소망’을 간직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의 소망이, 더 나아가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5절 하반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무엇을? ‘그의 사랑’을, 어디에? ‘우리의 마음속에’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을 통하여’는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음속에 성령이 임하길 원하지만,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부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에 ‘방언의 은사’를 받겠다고 겨울방학에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방언을 받으신 분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니 나무 하나를 뿌리 채 뽑을 정도로 기도하면 된다고 합니다. 큰 나무는 엄두가 나서 못하겠고, 제 손 아귀에 들어오는 소나무를 한 그루 잡고 추위에 덜덜 떨며 기도했습니다만, 나무도 뽑지 못했고, 방언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한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다른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내가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시고,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부끄러움 없는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하나님의 사랑은 Agape입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에 새로운 의미를 준 단어인데, 신약성서 외에 그 시대 헬라어 필사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agape는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가장 잘 되기를 항상 소망하는 자비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대가 없이 값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이런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가치를 따지지 않고, 대가 없이 사랑하셨기에 이방인이었던 우리들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였지만 성령의 주권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agape는 마음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사랑인 philos보다는 자발적인 사랑이요, 감정적인 사랑에 해당하는 eros보다는 의지와 관련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은 agape사랑이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값없이 주신 사랑이라 값싼 사랑이 아닙니다. 값을 주고는 누구도 살 수 없는 사랑이기에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공기와 바람과 햇살과 물과 흙 이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의 주제요, 바울의 구원론의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은 以信偁義, 以信得義라고 합니다. ‘稱義’라고도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 존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직 의롭지 않지만, 구속 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격이 없음에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요, 거저주신 선물이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요 행동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요,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에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한다면, 사막에서 신기루를 오아시스로 알고 따라가는 여행자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없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답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를 누립니다(1).
이 평화는 우리 삶에 평화를 주는 근원이요, 내면적인 심령에 평화를 주는 원천입니다. 이 평화는 반드시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얻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중보자로서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서 있는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2상).
평화를 누리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슬러 올라가보니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합니다(2하).
하나님과의 친교, 화해를 회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인해 즐거워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즐거워합니다’로 해석된 헬라어 ‘ĸαυχάομαι(카우카오마이)’는 기뻐 날뛰다, 크게 즐거워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이나 고난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는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의 일생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소망과 자랑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즐거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은혜 속으로 들어오신 여러분,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즐거운 것입니다. 이것이 以信得義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과 4절에서 환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력을,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 해석되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개역성경의 말씀에 익숙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다른 단어들보다 ‘연단’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보았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단련된 인격’으로 해석이 되었고, 원문성경에서는 ‘연단된 인격’으로, 메시지는 ‘인격을 단련시켜 주며’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니 연단은 대장장이가 쇠를 연단하여 단단하게 하듯 우리의 인격, 성품을 단단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연단’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신앙이 깊어지면 인격, 성품도 깊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인격과 성품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른으로 존경을 받고 싶다면, 인격과 성품을 단련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본이 되고 싶다면, 우리의 인격과 성품을 단련해야 합니다. 신앙은 좋은 데 인격에 문제가 있다거나 성품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신기루를 쫓은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신앙과 인격, 신앙과 성품은 비례합니다. 성과 속이 하나이듯, 신앙과 인품도 하나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끄러움 없는 소망’이 되려면 신기루가 아니라 오아시스를 쫓아야 합니다.
신앙은 두루뭉술하면 안 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며 “너는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하시며,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나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겠다!”고 하십니다. 왜 토합니까? 역겨워서 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해결방안을 제시합니다. “너의 마음을 가다듬고 회개하여라!”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以信偁義, 以信得義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여전히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우리를 부끄럽지 않는 소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온전치 못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부끄럽지 않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세상의 많은 이들이 신기루를 쫓아 살아가다 실망합니다. 우리는 오직 오아시스 되시는 주님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성품이 날로 단련되어 주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