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다섯째주일(20220515)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갈 새 계명
성서일과 : 요한복음 13:31~35
병행본문 : 계21:1~5,행 11:1~18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요?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사랑의 종교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 사랑 없이는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다르지 않다 하셨고, 인간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병행본문 요한계시록 21장 1절~6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려면 새 계명’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요, 그 새 계명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병행본문 사도행전 11장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이 마침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음을 밝히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별설교를 통해서 새 계명을 주시고, 제자들이 새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세상도 제자임을 인정해 줄 것이라 하십니다. 말로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제자를 제자로 인정해 줄 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서일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사랑’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에 해당합니다.
고별설교의 주제는 ‘서로 사랑하라’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성만찬을 나누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집중하지 못한 이가 한 명 있죠. 유다는 제자들이 영광스러운 성찬식에 참여하고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유다가 나간 뒤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시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어떻게 팔아넘길까 모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혁명가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재정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자 그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악마가 시몬 가롯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요 13:2)’고 밝힙니다.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조국을 꿈꾸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3년간 좇았던 유다는 자신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가 돈에 욕심이 있어 예수님을 판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가 정말 돈에 욕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했던 것뿐입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에서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당신의 이상이 우리 모두를 망쳐놓고 있어!” 유다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여 제자가 되었지만, 유다는 독립을 꿈꾸는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예수님의 생각과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팔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자살 합니다. 예수를 팔아 돈 벌고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보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로마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던 유다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유다의 잘못은 자신의 꿈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겠다는 잘못된 착각을 하고 있었단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다면 자기의 생각을 바꿔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악마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채지 못합니다.

여기, 유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명백하게 나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서, 심지어는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며 많은 일을 할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에 예민해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고집스럽게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따르리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늘 섬세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늘 깨어있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귀한 믿음 지켜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요 13:31,32).”
다음 성경 본문에 따르면 첫 번째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둘째,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고, 셋째로, 하나님과 인자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영광입니다.
세 가지 영광을 부연 설명하면,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받으셨지만 부활하시어 영광 받으셨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고’, 즉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최고의 뜻을 이루심으로 영광 받으셨고, ‘하나님과 인자가 영광을 받으셨고’, 즉,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이 영광이고 아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영광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영광을 받으셨고’라고 표현했습니다.

‘받으셨고’라는 헬라어는 ‘미래에 확실하게 이뤄질 일’을 의미합니다.
확실하게 이뤄질 일이므로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받으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제임스킹 성경에서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이 부분을 ‘now’라는 현재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니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 길을 가는 ‘지금’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죠. 여러분, 신앙은 과거도 미래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삶도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삶을 살아가십시오. 여러분께서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도 기쁨이 되고 영광스러운 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표현은 복음서 중에서는 요한복음 13장 33절이 유일합니다.
이 표현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신 후에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입니다. 그 길 끝에 부활이 있고, 승천하신 후의 하나님 나라가 있지만 제자들은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제자들에게 매몰찬 말씀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같이 가자!”하지 않으시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갈 수 없다!”고 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감당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남아서 무엇을 했습니까?
십자가의 도를 전했고, 그로인해 초대교회가 생겼고, 유대를 넘어 이방인인 우리들에게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오늘 병행본문 사도행전 11장 1~8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 확대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하시며 사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을 위해 힘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셔서, “잘 하였다. 충성된 종아!” 칭찬받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에게 맡겨주신 사명, 그것은 바로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새 계명’이라고 하신 데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 ‘카이넨kainen’은 ‘신선한, 새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전에도 ‘사랑하라’는 계명은 있었지만, 새 계명, 신선한 계명,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가 새롭게 추가되었기 때문이죠.
이전에도 ‘사랑’은 있었고 지금도 ‘사랑’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그런 기존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사랑이 새 계명입니다.
옛 계명은 자기처럼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이것을 초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찌하셨습니까?
즉, 새 계명의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헬라어 동사는 현재형으로 ‘지금부터 계속 사랑하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잠시 다른 사랑의 모습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속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에로스는 이기적인 사랑이요, 필리아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요, 아가페는 조건이나 사심 없는 희생을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로스나 필리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친구도 사랑할 줄 알게 되고, 그래야 아가페 사랑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한 단계에 머물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예수님이 하신 아가페의 사랑까지. 점점 더 확장되어 가는 사랑을 위해 노력하고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은 새 계명을 따라 살아가시는 성숙한 신앙인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의미를 다시금 새겼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어떤 일들이 생겨날까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가신다고 했지만, 결국 새 계명을 지키는 이들 안에 계시는 것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들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 인해 예수님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면 세상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말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다!”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것은 표적이나 형식이나 사람 숫자가 아닌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에 서 있을 때에만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병행본문 계시록 21장 1~6절의 말씀에서 요한은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보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21:1,5).”노래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 새 계명을 지키는 교회를 통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새 계명을 잘 지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가시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남교회도 새 계명을 잘 지키는 교회가 되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거둠 기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처럼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길 결단하고,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믿습니다.
주님,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제자인 우리와 교회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